불확정성의 원리
'불확정성원리'란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알아낼 수 없고, 두 측정값의 부정확도를 일정 이하로 줄일 수 없다는 양자역학적 원리이다. 고전역학의 예측과는 달리, 양자역학에서는 위치와 운동량이 동시에 확정적인 값을 가질 수 없으며 위치의 불확정성과 운동량의 불확정성이 플랑크상수에 의해 제한되어있다. 이는 입자계로부터 동일한 측정의 과정을 여러번 거친 통계에 대한 진술이지, 단순히 입자계를 한번 측정하여 얻어지는 결과가 아니다. 양자현상은 특정한 시도에 의해 그때그때 얻어지는 결과물에 대한 예측이 아니며, 여러번의 관찰로부터 얻어지는 기대값과 같은 통계적인 예측만을 할 수 있다. 불확정성원리는 이러한 양자현상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물리적인 원리이다. 불확정성원리는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 관계에만 성립하는 것만이 아니라 양자역학의 일반적인 관측에 적용될 수 있다. 양자현상의 관측량들은 연산자(operator)에 의해 얻어지는데, 각 연산자들 사이에는 일반적으로 교환법칙이 성립하지 않는다. 교환법칙이 성립하지 않는 두 연산자를 '교환(맞바꿈) 관계에 있지 않다'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두 연산자에 대해서는 불확정성원리가 성립한다. 앞서 언급한 위치와 운동량은 교환 관계에 있지 않기 때문에 위치와 운동량의 측정은 불확정적인 것이다. 반면 3차원 공간에서의 위치와 운동량을 측정할 경우엔, 동일하지 않은 방향에서의 위치와 운동량은 서로 교환 가능한 관계이므로 그것들에 대해서는 불확정적이지 않게(정확하게) 관측할 수 있다. 예를들어 직교좌표계에서의 관측을 생각해보자. x축 상의 위치를 측정하는 행위는 x축상의 운동량에 영향을 주지만, 이 관측은 y축과 z축 상의 위치와 운동량 관측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으며 모든 관측에 불확정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처음의 결과가 실험 오차에 의한 것이었다면 x축상의 위치와 y축상의 운동량의 측정 역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야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점이 바로 기술적 한계와 불확정성 원리가 구별되는 점이다. 또한 불확정성원리는 관측 행위의 순서가 관측하고자 하는 상태에 영향을 주는 양자현상의 특징을 함축하고 있기도 하다. 교환관계에 있지 않은 두 연산자에 의한 관측을 연속적으로 수행하는 경우, 즉 한번의 관측을 수행한 후 다른 관측을 수행할 때 두 관측 순서를 바꾸면 각각은 다른 결과가 얻어지게 된다. 이것은 처음의 관측에 의해 상태가 변화하게 되어 다음 관측에서는 처음과 동일하지 않은 상태에 대해 측정을 수행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이렇게 '초기 상태가 관측에 의해 다른 상태로 바뀌는 것'을 '파동함수의 붕괴 (Wave fuvction collapse)'라고 말한다. 양자 현상의 상태는 파동함수로 표현되므로, 그 파동함수가 변화했다는 것은 수학적 계산에 의해 전과 같은 관측량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양자물리학 이야기를 하면서 불확정성의 원리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독일의 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 1901~1976)가 제안한 불확정성의 원리는 코펜하겐 해석의 핵심 내용 중의 하나이다. 많은 물리학 해설서나 현대 물리학 입문서에서 불확정성의 원리를 다루고 있어 불확정성 원리는 양자 물리학의 내용 중 가장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내용이기도 하다. 하지만 수학을 떠나서 불확정성 원리를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불확정성 원리에 대해 많은 것을 들어서 알고 있는 사람들도 조금씩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불확정성의 원리는 말 그대로 확실하지 않다는 원리이다. 확실한 것만을 다루는 것으로 알려진 물리학에 왜 이런 원리가 등장하게 되었을까? 무엇이 왜 불확실하다는 것일까?
수많은 사인과 코사인 파동의 합으로 입자를 표현하는 웨이브 패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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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인과율로 세상을 설명해왔던 뉴톤역학의 세계를 뒤집어 버린다. 하이젠베르크는 빛의 입자와 파동성을 연구한 결과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은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쉽게 설명하자면 입자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게 되면 운동량을 나타내는 속도에 관한 정보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속도에 관한 정보를 완전히 알면 위치에 관한 정보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 따라서 어떤 입자의 물리상태는 위치와 속도 모두에서 어느 정도의 오차, 불확실성을 가지고만 표현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뉴톤역학 세계에서는 초기 조건이 일정하면 어떤 경우에도 동일한 결론을 얻는다. 그런데 불확정성 이론에서는 결과값을 얻기 위해 측정을 하는 순간 그 측정 행위로 인해 최초로 설정된 조건들이 바뀌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결국 불확정성의 원리는 결국 자연계, 특히 극히 작은 물질 단위의 세계에서는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는 없고 다만 통계적으로만 설명할 수 있다는 '비결정론적인 세계관' 이다. (이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많다. 세계가 확률적으로 “결정” 된다는 점에서 결국은 넓은 의미의 결정론이라는 주장이 있다.)
철학이나 인문학은 과학적 성과 앞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과학에서 중요한 진보는 곧바로 인문학문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갈브레이드가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규정한 이면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자리하고 있다. 어떤 물체를 쪼개고 쪼개서 미시 단위로 들여다 봤을 때 그 존재 자체를 확률적으로 밖에 규정할 수 없다는 사실은 가히 혁명적인 발견이었다. 뉴톤 역학의 자장을 벗어난 전자 단위에서 존재 자체가 불확실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 육신은 과연 존재하는가? 존재한다, 다만 확률적으로.... 내 세포의 최후 구성 단위에서 100% 존재를 규정하는게 불확실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포로 구성된, 눈에 보이는 내 육신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가? 나는 존재한다고 말 할 수 있는가?
<불확실성의 시대>는 시대의 자식에 불과, 시간의 풍화 견디지 못해
<불확실성의 시대>는 1975년 출간되었다. 오일쇼크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황폐했고 모든 사람들이 불안에 떨었다. 미래는 확실하지 않았고 변화 속도는 점차 빨라졌다. 갈브레이드는 그러한 시대적 징후를 정확히 <불확실성>으로 요약했고 공전의 히트를 쳤다. 24년 전에 사놓은 책을 다시 꺼내 읽어봤다. 결론은 이 책은 예전에 시중에서 떠드는 만큼 불세출의 저작이 아니고 그저 평범한 시대의 자식이라는 확인 뿐이었다. 영국 BBC 방송을 위해 저술한 책으로 그 당시 시대적 흐름을 정확하게 진단했을 지언정 지금은 시간의 풍화작용을 견디지 못하고 빛이 바래 버렸다.
역시 경제학 책은 최신간을 읽을 일이다. 물론 마르크스를 지금 읽는 것은 의미가 있을 수도 있다. 대체적으로 과거 경제학은 역사적 가치는 있을 지라도 복잡하고 급변하는 현대를 해석하고 진단하는데는 무용지물이라는 사실. 지금 세상은 갈브레이드가 체감했던 당시의 시간보다 100 배는 빨라졌다. 자본의 탐욕도 극한적으로 치닫고 있다. 속도와 탐욕이 어우러지는 천민자본주의가 마지막 광태(狂態) 를 보여주는 우울한 세기의 초입이다. 이 책의 완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경제사 흐름에 대한 개관 정도다. 미국인들 저술 특징인 장황한 해설과 수사체 문장으로 인해 책의 두께만 더해졌다. 정리하는 의미에서 인터넷에서 갈브레이드에 대한 소개 글을 퍼왔다. |
하지만 이런 논리에 선뜻 동의하지 않는 시민들도 많다. '과학적 불확실성' 때문에 과학적 연구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사전예방의 원칙'을 강조하면서 엉터리 예측을 남발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지구온난화 이론이 전형적인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지구가 더워지고 있으며, 그 주범은 인간이 만드는 온실가스라는 지구온난화의 핵심적 결론에 대해 절대 다수의 과학자들이 지지하고 있다니 '지구온난화 이론' 자체는 과학적 사실이라고 믿어주자. 사실 지구온난화 이론 자체를 '과학적 사기극'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일부 '기후변화 회의론자들'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