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연구

불확정성의 원리

때에 따라 체인지하라 2010. 1. 29. 13:48

'불확정성원리'란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알아낼 수 없고, 두 측정값의 부정확도를 일정 이하로 줄일 수 없다는 양자역학적 원리이다. 고전역학의 예측과는 달리, 양자역학에서는 위치와 운동량이 동시에 확정적인 값을 가질 수 없으며 위치의 불확정성과 운동량의 불확정성이 플랑크상수에 의해 제한되어있다. 이는 입자계로부터 동일한 측정의 과정을 여러번 거친 통계에 대한 진술이지, 단순히 입자계를 한번 측정하여 얻어지는 결과가 아니다. 양자현상은 특정한 시도에 의해 그때그때 얻어지는 결과물에 대한 예측이 아니며, 여러번의 관찰로부터 얻어지는 기대값과 같은 통계적인 예측만을 할 수 있다. 불확정성원리는 이러한 양자현상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물리적인 원리이다.

불확정성원리는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 관계에만 성립하는 것만이 아니라 양자역학의 일반적인 관측에 적용될 수 있다. 양자현상의 관측량들은 연산자(operator)에 의해 얻어지는데, 각 연산자들 사이에는 일반적으로 교환법칙이 성립하지 않는다. 교환법칙이 성립하지 않는 두 연산자를 '교환(맞바꿈) 관계에 있지 않다'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두 연산자에 대해서는 불확정성원리가 성립한다. 앞서 언급한 위치와 운동량은 교환 관계에 있지 않기 때문에 위치와 운동량의 측정은 불확정적인 것이다. 반면 3차원 공간에서의 위치와 운동량을 측정할 경우엔, 동일하지 않은 방향에서의 위치와 운동량은 서로 교환 가능한 관계이므로 그것들에 대해서는 불확정적이지 않게(정확하게) 관측할 수 있다. 예를들어 직교좌표계에서의 관측을 생각해보자. x축 상의 위치를 측정하는 행위는 x축상의 운동량에 영향을 주지만, 이 관측은 y축과 z축 상의 위치와 운동량 관측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으며 모든 관측에 불확정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처음의 결과가 실험 오차에 의한 것이었다면 x축상의 위치와 y축상의 운동량의 측정 역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야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점이 바로 기술적 한계와 불확정성 원리가 구별되는 점이다.

또한 불확정성원리는 관측 행위의 순서가 관측하고자 하는 상태에 영향을 주는 양자현상의 특징을 함축하고 있기도 하다. 교환관계에 있지 않은 두 연산자에 의한 관측을 연속적으로 수행하는 경우, 즉 한번의 관측을 수행한 후 다른 관측을 수행할 때 두 관측 순서를 바꾸면 각각은 다른 결과가 얻어지게 된다. 이것은 처음의 관측에 의해 상태가 변화하게 되어 다음 관측에서는 처음과 동일하지 않은 상태에 대해 측정을 수행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이렇게 '초기 상태가 관측에 의해 다른 상태로 바뀌는 것'을 '파동함수의 붕괴 (Wave fuvction collapse)'라고 말한다. 양자 현상의 상태는 파동함수로 표현되므로, 그 파동함수가 변화했다는 것은 수학적 계산에 의해 전과 같은 관측량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양자물리학 이야기를 하면서 불확정성의 원리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독일의 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 1901~1976)가 제안한 불확정성의 원리는 코펜하겐 해석의 핵심 내용 중의 하나이다. 많은 물리학 해설서나 현대 물리학 입문서에서 불확정성의 원리를 다루고 있어 불확정성 원리는 양자 물리학의 내용 중 가장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내용이기도 하다. 하지만 수학을 떠나서 불확정성 원리를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불확정성 원리에 대해 많은 것을 들어서 알고 있는 사람들도 조금씩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불확정성의 원리는 말 그대로 확실하지 않다는 원리이다. 확실한 것만을 다루는 것으로 알려진 물리학에 왜 이런 원리가 등장하게 되었을까? 무엇이 왜 불확실하다는 것일까?

 

 

수많은 사인과 코사인 파동의 합으로 입자를 표현하는 웨이브 패킷


전자와 같은 입자도 파동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실험을 통해 확인되었다. 양자 물리학은 불연속적인 물리량을 가지는 입자를 파동함수로 다루고, 그 결과를 확률로 해석하는 물리학이다. 입자를 파동방정식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입자도 파동함수로 나타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입자를 어떻게 파동함수로 나타낼 수 있을까?

 

고등학교에서 물리학을 배운 사람들은 사인(sine) 또는 코사인(cosine)과 같은 삼각함수로 파동을 표현하는 법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파동으로 입자를 나타내기는 어렵다. 파동이 넓은 공간에 퍼져 있는 것과는 달리 입자는 아주 좁은 공간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학을 이용하면 이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다. 진동수진폭이 다른 많은 파동을 합치면 한 곳에 집중된 파동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만약 더 좁은 구역에 집중된 파동을 만들고 싶으면 파장이 다양한 더 많은 사인파와 코사인파를 더하면 된다. 이렇게 여러 개의 파동을 합성하여 만들어진 파동을 양자 물리학에서는 웨이브 패킷이라고 부른다. 양자 물리학에서 입자는 웨이브 패킷을 이용하여 나타내진다.

 

 

 

위치와 운동량을 곱하면 일정한 숫자보다 항상 크다 : 불확정성의 원리

입자는 이 웨이브 패킷 내의 어느 곳에 있게 된다. 따라서 웨이브 패킷의 너비가 좁으면 입자의 위치에 대한 불확실성이 작아지고 반대로 웨이브 패킷의 너비가 커지면 위치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진다. 좁은 너비를 가지는 웨이브 패킷을 만들기 위해서는 다른 진동수를 가지는 더 많은 파동을 합해야 한다. 입자의 운동량은 진동수에 비례하고 따라서 파장에 반비례한다. 그러므로 좁은 너비를 가지는 웨이브 패킷을 만들기 위해 다른 진동수를 가지는 많은 파동을 합하게 되면 운동량의 불확실성은 커진다. 다시 말해 위치 측정의 오차를 줄이려고 하면 운동량 측정의 오차가 증가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위치와 운동량 사이에 존재하는 불확정성이다. 하이젠베르크는 위치의 오차와 운동량 오차의 곱은 일정한 값 이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했다. 이것을 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이 식에서 Δx는 위치의 오차를 나타내고 Δp는 운동량의 오차를 나타내며 ℏ는 플랑크 상수를 2π로 나눈 값이다. 불확정성의 원리 때문에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불확정성의 원리는 시간과 에너지 사이에도 존재한다. 어떤 양들 사이에 불확정성이 존재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다. 다만 여기서는 위치와 운동량, 그리고 에너지(질량)와 시간 사이에 불확정성의 원리가 적용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불확정성의 원리, 하나를 측정하는 동안 다른 하나가 변화한다

불확정성의 원리는 위치의 측정이 운동량을 변화시키고, 반대로 운동량의 측정이 위치를 변화시켜 오차를 증가시키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이런 설명은 잘못된 설명이 아니다. 하이젠베르크와 보어도 이런 방법으로 불확정성 원리를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물리학 입문서에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런 설명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설명이다.

 

 

 

전자를 관찰할 수 있는 현미경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현미경으로 전자를 관측하기 위해서는 전자에 충돌한 빛이 현미경으로 들어와야 한다. 전자의 위치를 정확하게 측정하기 위해서는 파장이 짧아서 에너지가 큰 빛을 사용해야 한다. 이런 빛으로는 전자의 위치를 작은 오차로 측정할 수 있지만, 측정 과정에서 전자의 운동량을 크게 변화시킨다. 반대로 운동량의 변화를 최소로 하여 운동량의 오차를 줄이려고 하면, 빛의 긴 파장 때문에 위치에 오차가 커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불확정성의 원리를 입자의 기본 성질이 아니라 측정 과정 때문에 나타나는 효과라고 생각하게 하기 쉽다. 하이젠베르크와 보어는 이런 설명을 논리적인 인식론의 철학적 체계 안에서 사용했다. 논리적인 인식론에서는 어떤 계의 물리적 성질은 측정 가능한 가장 정확한 측정값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라 본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만약 어떤 측정값이 이론적으로 어떤 오차보다 더 작아질 수 없다면, 이러한 한계는 물리적 성질 때문이지 측정 장치나 측정 기술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불확정성 원리는 측정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측정하고자 하는 입자 자체가 가지고 있는 물리적 성질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21 세기 ---

산업사회의 기계적확실성에서 불확실성으로...

 

하이젠베르크는 양자역학이론의 태두다. 그는 미시세계에서 뉴톤역학이 적용되지 않음을 규명함으로써 현대물리학의 초석을 다진 인물이다. 하이젠베르크 이론의 핵심은 불확정성이다. 우리 앞에 있는 책상. 그것을 보는 나는 뉴톤역학의 자장 속에 있다. 책상은 내 눈 앞에 존재한다. 그런데 책상을 쪼개서 파고 들어가 보면 상황은 달라진다. 책상을 쪼개고 쪼개서 마지막 구성 단위인 양자 수준까지 내려갔다고 할 때를 생각해보자. 그 때 양자는 뉴톤역학에서 처럼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이젠베르크는 ‘불확정하다’고 말한다. 양자의 위치와 속도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는 것이다. 입자 위치를 정확히 측정할수록 속도가 부정확해지며 속도를 정확히 관측하자니 위치가 부정확하다는 것. 양자의 존재 자체가 불확정 상태로 있는 것이다.

 

철학은 과학의 뒷다마다. 과학에서 새로운 원리나 가설이 출현 할 때 철학은 이전의 주장을 파기하고 과학적 진리를 사회현상에 적용하면서 옷을 새로 바꿔 입는다. 한마디로 철학은 과학의 시녀다. 세상이 신의 섭리에 의해 운행된다는 중세적 가치관을 뉴톤이 만유인력을 들고 나와 뒤집어 버렸고, 뉴톤 역학은 산업혁명을 불러오면서 새로운 세기를 연다. 모든 것은 과학으로 설명이 가능한 확실한 세계였다. 그러나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나오면서 세상에 확실한 것이 있다고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갈브레이스는 20 세기를 불확실성의 시간으로 규정했다. 눈에 보이는 세상도 원자 레벨에서 위치와 속도를 정확히 파악하기 힘든 것처럼 불확실하게 변해가고 있다. 언제 서브프라임 사태 같은 악재가 터질지 모르게 되어 버린 것이다. 특히 주식시장이야말로 불확실함의 난바다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이러한 곳에서 어떤 확실함을 추구한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인과율로 세상을 설명해왔던 뉴톤역학의 세계를 뒤집어 버린다. 하이젠베르크는 빛의 입자와 파동성을 연구한 결과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은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쉽게 설명하자면 입자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게 되면 운동량을 나타내는 속도에 관한 정보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속도에 관한 정보를 완전히 알면 위치에 관한 정보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 따라서 어떤 입자의 물리상태는 위치와 속도 모두에서 어느 정도의 오차, 불확실성을 가지고만 표현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뉴톤역학 세계에서는 초기 조건이 일정하면 어떤 경우에도 동일한 결론을 얻는다. 그런데 불확정성 이론에서는 결과값을 얻기 위해 측정을 하는 순간 그 측정 행위로 인해 최초로 설정된 조건들이 바뀌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결국 불확정성의 원리는 결국 자연계, 특히 극히 작은 물질 단위의 세계에서는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는 없고 다만 통계적으로만 설명할 수 있다는 '비결정론적인 세계관' 이다. (이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많다. 세계가 확률적으로 “결정” 된다는 점에서 결국은 넓은 의미의 결정론이라는 주장이 있다.)

 

철학이나 인문학은 과학적 성과 앞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과학에서 중요한 진보는 곧바로 인문학문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갈브레이드가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규정한 이면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자리하고 있다. 어떤 물체를 쪼개고 쪼개서 미시 단위로 들여다 봤을 때 그 존재 자체를 확률적으로 밖에 규정할 수 없다는 사실은 가히 혁명적인 발견이었다. 뉴톤 역학의 자장을 벗어난 전자 단위에서 존재 자체가 불확실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 육신은 과연 존재하는가? 존재한다, 다만 확률적으로.... 내 세포의 최후 구성 단위에서 100% 존재를 규정하는게 불확실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포로 구성된, 눈에 보이는 내 육신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가? 나는 존재한다고 말 할 수 있는가?

 

<불확실성의 시대>는 시대의 자식에 불과, 시간의 풍화 견디지 못해

 

<불확실성의 시대>는 1975년 출간되었다. 오일쇼크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황폐했고 모든 사람들이 불안에 떨었다. 미래는 확실하지 않았고 변화 속도는 점차 빨라졌다. 갈브레이드는 그러한 시대적 징후를 정확히 <불확실성>으로 요약했고 공전의 히트를 쳤다. 24년 전에 사놓은 책을 다시 꺼내 읽어봤다. 결론은 이 책은 예전에 시중에서 떠드는 만큼 불세출의 저작이 아니고 그저 평범한 시대의 자식이라는 확인 뿐이었다. 영국 BBC 방송을 위해 저술한 책으로 그 당시 시대적 흐름을 정확하게 진단했을 지언정 지금은 시간의 풍화작용을 견디지 못하고 빛이 바래 버렸다.

 

역시 경제학 책은 최신간을 읽을 일이다. 물론 마르크스를 지금 읽는 것은 의미가 있을 수도 있다. 대체적으로 과거 경제학은 역사적 가치는 있을 지라도 복잡하고 급변하는 현대를 해석하고 진단하는데는 무용지물이라는 사실. 지금 세상은 갈브레이드가 체감했던 당시의 시간보다 100 배는 빨라졌다. 자본의 탐욕도 극한적으로 치닫고 있다. 속도와 탐욕이 어우러지는 천민자본주의가 마지막 광태(狂態) 를 보여주는 우울한 세기의 초입이다. 이 책의 완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경제사 흐름에 대한 개관 정도다. 미국인들 저술 특징인 장황한 해설과 수사체 문장으로 인해 책의 두께만 더해졌다. 정리하는 의미에서 인터넷에서 갈브레이드에 대한 소개 글을 퍼왔다.

이 분야의 지지자들은 "요즘 세상이 복잡해져서 과학으로도 다루기 어려운 현상이 많다"고 '과학적 불확실성'을 인정하면서도 "혹시 연구 결과가 맞다면 큰 일이 아니냐"며 '사전예방의 원칙'이 중요하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이런 논리에 선뜻 동의하지 않는 시민들도 많다. '과학적 불확실성' 때문에 과학적 연구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사전예방의 원칙'을 강조하면서 엉터리 예측을 남발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지구온난화 이론이 전형적인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지구가 더워지고 있으며, 그 주범은 인간이 만드는 온실가스라는 지구온난화의 핵심적 결론에 대해 절대 다수의 과학자들이 지지하고 있다니 '지구온난화 이론' 자체는 과학적 사실이라고 믿어주자. 사실 지구온난화 이론 자체를 '과학적 사기극'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일부 '기후변화 회의론자들'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