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연구

시간은 시작이 없다

때에 따라 체인지하라 2010. 3. 6. 16:26

1998년에 출간된 '시간의 역사'는 런던ㆍ선데이 타임스ㆍ 베스트셀러 목록에 237주간이나 올랐으며, 지구 위의 남성과 여성과 아동 750명 중 한 명이 구입한 책이다. 현대 물리학의 가장 어려운 주제들을 다룬 책으로서, 이것은 정말 대단한 성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주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거대하고 기초적인 질문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우리는(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원초적인 질문과 닮아 있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흥미를 가지고 읽어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짧고 쉽게 쓴 ‘시간의 역사’』의 핵심 또한 이러한 기초적인 질문에서 시작된다. 이 책은 우주과학과 물리학의 통일이론을 주로 다루고 있다. 일반인들이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우주과학을 보다 읽기 쉽도록 하기 위해서 '시간의 역사'에서 다루었던 일부 전문적인 내용이 삭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래 책의 핵심을 더 깊고 면밀하게 다룬데다 새로운 정보를 추가하고, 새로운 이론의 관찰 결과들을 삽입시켰다는 점에서 더 완전한 책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호킹은 초끈이론, 나아가서 초끈이론이 시사하는 브레인 우주론을 다루면서 현재의 시점에서는 초끈이론이 만물의 이론, 즉 구극적 이론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한다. 양자중력이론에 대한 그의 희망도 강하게 표명되고 있다.
시간과 우주의 본질, 우주의 역사와 미래와 같은 근본적 문제를 다루는 이 책의 미덕은 최신 우주론의 설명에 그치지 않고, 물질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저자의 철학적 관점을 심도 있게 보여주고 있다는 데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책이 독자들을 사로잡는 이유는 과학 저술가 믈로디노프의 도움으로 37개의 원색 도판까지 이용하여 우주론의 기초 이론에서 최신 이론까지 누구나 짧은 시간에 더 많이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한 호킹의 학문적 노력과 지혜일 것이다.

 

시간의 목소리 Voice of Time』라고, 시간에 대한 논문을 모아 놓은 20세기 명저가 있다.
거기 보면, 우리들이 쓰는 언어라는 게 전부 시간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이 강의도 ‘언제부터 언제까지 한다.’고 시간을 전제로 하고 있다. "내일 보자", "나중에 만나자."
"지금 어디로 가고 있다." 등등, 인간 활동의 밑바탕에는 항상 시간 의식이 깔려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가 진화론에서 배운 건 직선 시간관이다. 약 3백만 년 전에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있었다느니 하는 게, 전부 직선 시간관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그렇게 직선적으로 흘러가 버리는 게 아니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시간의 밀도를 한번 생각해 보자. 봄, 여름, 가을, 겨울, 철마다 시간의 밀도가 다르다. 또 아주 바쁜 낮의 시간대와, 집에 돌아와서 다리 씻고, 편안한 마음으로 텔레비전 보면서 가족들과 대화하는 저녁 시간대의 밀도를 비교해 보라. 같은가? 다르다. 또 잠잘 때는 어떤가? 깊은 잠에 빠지면, 시간의 흐름을 전혀 인식 못 한다. 카오스적이다. 이게 우주 내면 질서의 신비다.
 
이 세상 모든 진리의 핵심 명제는, 결국 이 시간이 무엇인지, 시간의 비밀을 푸는 것이다.

 
그런데 시간에 대해, 아주 성숙한 얘기를 한 사람이 있다. 노벨상 수상자 일리야 프리고진(Ilya Prigogine)이다. 그는 『확실성의 종말(La Fin des certitudes)』에서 이렇게 말했다.
"시간은 시작이 없다." 이게 무슨 말인가?
 
최근 우주망원경으로 관측한 결과, 이 우주는 이전에 측정했던 것보다 훨씬 빠른, 백억 년 전에 열린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대폭발(Big bang)로 천지가 원시 개벽된 시점 이전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곧 천지개벽도 우주가 탄생한 하나의 사건일 뿐이라는 것이다.
시간은 영원히 멈추지 않는다.
 
"시간의 시작은 없다!" 이 말은 우리의 닫혀있던 의식을 참으로 시원스럽게 해방시켜 주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만일 시작이 있다면 끝도 있을 것 아닌가. 끝은 죽음이다.
 
일찍이 동양사상사에서 그런 멍청한 말을 한 사람이 있는가? 일리야 프리고진의 말대로, 우주는 시작도 끝도 없이 항상 열려있다. 이 사람은 기존의 서구의 시간론을 다 뒤집는다.
 
우주에는 시간의 물결, 변화의 현상은 있으나, 시간의 실체는 없다.
과거는 흘러가서 없고, 현재는 멈추지 않고 계속 흐르고 있으며, 미래는 오지 않았다. 그러니 시간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사실 동양에서나 서양에서나 자연 변화의 속성은 순환이라는 걸 깨달았다.
 
수천 년 동안, 인간이 자연에 대한 변화를 들여다보고 깨달은 주제를 한마디로 말하면,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 곧 음양론이다. 한 번은 음(陰)운동을 하고, 한 번은 양(陽)운동을 하는 것!
그 가운데 가장 작은 음양의 변화는, 하루 낮과 밤[晝夜]이 바뀌는 것이다. 지구촌 어느 곳에서도, 주기만 좀 다를 뿐이지, 낮과 밤은 어김없이 바뀐다. 일음일양지위도! 한 번 음 운동, 한 번 양 운동을 지속적으로 반복하면서 변화하는 게, 자연의 근원 질서[道]라는 말이다. 낮과 밤의 지속적인 반복, 그것이 순환(circulation)이다.
 

서양의 철인들도 하루 낮과 밤의 순환을 인식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우주 1년으로 확대 인식하지 못했다. 물론 수천 년 된 고대 그리스문화를 보면, 그들도 우주의 큰봄, 큰여름, 큰가을, 큰겨울이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러나 그뿐이다.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구조로, 어느 정도의 시간 간격을 두고 오는지를 몰랐다. 더욱이 중동의 사막문화에서는, 환경적으로 순환 체험을 전혀 못 한다. 그래서 그 곳 사람들은 직선 시간관 의식이 강하다.

지구 1년을 보라. 지구는 하루에 360도 자전한다. 하루의 주야 동정(動靜)은 모든 변화의 기본이다. 이 만물 생명의 기본 변화인 동정의 리듬을 만드는 어머니 지구가, 1년 동안 360회 자전을 지속하면서 태양을 안고 공전하면,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온다. 그러면 지구 1년 4계절 생장염장의 변화가 끝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구 1년 4계절이 열려서, 봄이 되면 초목에서 새싹이 나와[生], 여름이면 잎과 줄기가 자라서 하늘을 덮었다가[長], 가을이 되면 낙엽이 지면서 열매를 거두고[斂], 겨울에는 쉰다[藏]. 그러고 나면 또 다른 지구 1년이 열리고, 봄이 오는 것이다.
지구 1년의 순환도수는, 360도가 360일 순환 반복하므로 12만9천6백 도다. 우주 1년은 360년이 360회 반복된

일단 인과율, 즉 원인과 결과의 관계라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쉽게 확정하지 못한다. 나뭇잎은 왜 녹색인가? 햇빛이라는 외부 물체의 자극 때문인가, 아니면 광합성 작용을 하는 분자들의 물질적인 내부 구성 때문인가, 아니면 그런 유리한 물질적인 구성을 갖도록 진화를 추동해가는 나무들의 생명력 때문인가? 합리적이고 가능한 대답 중에서, 원자들의 충돌이라는 인과관계가 압도적인 이미지로 떠오르게 된 것은 우리가 뉴턴 이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뉴턴의 법칙에 포위된 상태에서, 자유와 윤리의 여지를 확보하기 위해 철학자들은 점점 더 정신적인 요소에 호소했다. 그리고 당연히 그것은 물질의 학문, 자연과학에 적대적이었다. 그 적대감은 그저 말하기 좋아하는 몇몇 사람들만이 느끼는 추상적인 것만은 아니다. 정신과 물질의 간극이 벌어질수록, 우리 삶을 이루는 영역들 간의 괴리도 따라서 커지기 때문이다. 자연과학과 공학에는, 연습문제를 푸는 데 어떤 도움도 안 되기 때문에, 영화나 연극과 관련된 교양은 허용되지 않는데다 급기야 그것들을 비웃는 데까지 이른다. 반면 인문학은 물질 운동의 소용돌이에 무관심으로 일관하다, 동시대의 경제와 기술에 한참 뒤처지기도 한다.

일리야 프리고진(Ilya Prigogine)이라는 학자는 바로 그 지점, 괴리의 한복판에서 법칙과 자유에 대해 새롭게 사유했다(여담이지만, ‘일리야’는 프랑스어로 ‘~이 있다’라는 뜻인데, 그러니까 그는 1차 세계대전 이후 러시아에서 벨기에로 이주하면서, 가장 철학적인 이름을 얻게 된 셈이다). 그의 연구는 과학과 철학, 두 가지 측면에서 높은 성취를 보여준다. 우선, 그는 자신의 비평형 열역학 연구의 탁월한 성과로부터 과학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선언하는 데에까지 나아간다. 다른 한편, 자신의 연구에 담긴 사상적 함의를 설명하는 철학적 능력과 소양이 놀랍다. 그가 에피쿠로스부터 화이트헤드까지 인용할 때, 그 방대함과 정확성은 과학자의 저서로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것이다.


 


혁명의 시간마다 공명이 있었다

그의 저서 <확실성의 종말>에 따르면, 원리상 입자의 다음 궤적은 확률로만 알 수 있을 뿐이며, 여기에서 우연은 일차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 입자 궤적의 예측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입자들 간의 공명(共鳴)이다. 그러니까 뉴턴 역학은 입자들의 공명이 존재하지 않는 가정된 상황에서만 성립하는 근사치다. 그 경우 입자의 궤적은 정확히 결정론에 종속된다. 물론 우리의 실제 자연계는 수없이 많은 공명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므로 말하자면 뉴턴 역학보다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이 우리의 세계에 더 가깝다. 그의 작품엔 바다에, 하늘에, 산에, 골짜기에, 골동품 가게에 감춰진 공명들로, 혹은 그것들을 보존하려는 전투로 가득하다. 그리고 여기에서 자연과학과 역사는 하나로 통합된다. 말 그대로 함께 노래하고 소리치는 것, 그것이야말로 역사의 궤적을 바꾸었던 혁명의 시간마다 등장한 것이 아닌가.

 

울어버린 여관 주인 고양이의 죽음
어떤 단식 위대한 침묵
기도하자시네요 흡혈박쥐만큼만
왜 나만 가지고 그래? 초인종 괴담
할머니의 냉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