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Energy) 환경(Environment) 물(Water) 지속가능성(Sustainabili
―인류의 당면 과제는 뭔가.
"EEWS다. 에너지(Energy) 환경(Environment) 물(Water)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이다. 광범위한 얘기다. 그렇지만 그렇게 정하니까 전기자동차도, 모바일 하버 개념도 나오게 된다. 배·기차·항공기 이런 기술은 이미 100년 전에 발명이 되어 기업이 많이 투자한 쪽이다. 대학이 이 분야에선 경쟁이 되지 않는다. 국회에서 예산안이 부결돼 모바일 하버 예산이 올해는 없다. 그런데 미국 해군 쪽에서 이 부분에 관심이 많더라. 이런식의 반대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미국에서도 쫓겨날 뻔했다
―하긴 전과(前科)가 많더라.
"MIT 학과장(1991~2001) 시절, 처음엔 반대하더니 그만둘 때는 큰 잔치를 해주더라. 사실 50년대 미국에서는 기계공학이 잘나갔다. GM도 잘됐다. 그런데 세상은 변한다. 자동차는 기계공학에 컴퓨터공학을 더한 것이고, MRI 기술은 기계에 생물학을 더한 거다. 기계공학박사가 없는 다른 전공자를 기계과 교수로 뽑으니 난리가 났다. 날 쫓아내자는 사람이 절반이 됐다."(그가 10년간 학장을 하면서 MIT 기계과는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된다)
―레이건 대통령 시절(1984~88), 정부기구인 미 국립과학재단(NSF)에는 어떻게 가게 됐나.
"왜 나를 선택했는지 정말 나도 모르겠다. 아마 70년부터 MIT 교수로 재직하면서 기업체랑 많은 프로젝트를 추진해서 성공한 전례 때문이 아닌가 한다. 당시 MIT에서는 우리가 흔히 쓰는 플라스틱 소재 연구는 안 했다. 나는 이걸 하려고 내가 알던 기업에서 5억원(지금 돈 50억~60억원)쯤을 모아 연구비로 썼다. 그게 잘되니까 MIT에서 연구소를 만들라고 해서 7년을 했다. 어느 날 백악관서 전화가 왔다. 난 정치적인 사람도 아니고, 애들이 비싼 사립학교 다니는데 등록금 대기도 힘들어 갈까 말까 고민했다. 차관보급인데, MIT에서 올리는 수입보다 뚝 떨어졌다. 집사람이 1년만 하고 나오라더라."
―뭘 했나.
"조직을 3개월 만에 재정비했다. 화장실 위치 파악하기에도 짧은 시간에 많은 일을 했다고들 하더라. 1년 후 나가려고 했더니 더 있으라 해서 결국 4년을 하다가 나왔다."
―도중에 개혁에 대한 반발이 많았다고 하던데.
"우려하는 과학자 모임(Concerned Engineers of America)이 만들어져 직원 1600명이 전부 서명해 백악관에 보냈다. 나 쫓아내라고. 그런데 백악관이 무시했다. 퇴임할 때, 미 국회에서 일 잘했다고 특별히 의회 기록에 넣어 줬다." (그는 공과대처럼 되어 있던 조직을 개편해 아이디어만 좋다면 편지 한장으로도 연구비를 받도록 하는 등 조직을 혁신했다)
―전기차로도 비난을 많이 받았는데, 왜 초반에 설명하지 않았나. '제2의 황우석'이란 얘기는 듣지 않았을 것 아닌가.
"변명해 봐야 안 듣겠다는 사람은 듣지 않는다. 결국 시간이 해결해준다. 처음엔 '미국에서 10년 전에 실패했는데 우리가 가능하겠느냐'더니 그걸 증명하니 다음엔 그걸 무슨 변압기로 생각했는지 참새구이 되면 어찌하느냐며 안정성 시비를 걸더라. 그건 기초 상식에 해당하는 문제인데…. 그다음엔 경제성이 떨어진다더라. 그게 다 같은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외국에서 반응이 오니 이제 잠잠해졌다. 시간이 해결해주더라. 연구한 교수들이 외국에서 초청받아 강연 많이 다닌다."
―공개적으로 메커니즘을 설명했으면 괜찮지 않았을까.
"국제적으로 180가지 특허를 신청했다. 그것 때문에. 기술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 일이다. 사실 이게 우리 1학년들도 알고 있는 수준의 지식이다. 창의적 발상의 문제다."
―그러면 그런 전기차 프로젝트 디자인은 총장께서 한 것인가. 아무도 못한 것을 어떻게 카이스트가 했나.
"내가 아이디어를 내고, 전기공학 등 각 분야 전문교수가 디테일을 만들어낸 거다."
―그럼 총장님이 천재인가.
"나는 외국에서 못한 것도 몰랐다. 생각하니까 될 것 같아서 했다. 신성장동력단 단장을 할 때, 나는 전기차는 배터리가 너무 커서 안 되겠다 생각했다. 그럼 땅에서 뽑아내면 되지 않나 생각했다. 내가 연구한 분야가 네 분야쯤 된다. 설계이론도 내 전공 중 하나인데 남들보다는 그런 쪽 생각이 빨리 돌아간다."
―블룸버그 시장 얘기, 캠퍼스 유치하겠다는 얘기는 어떻게 나왔나.
"내가 지난 크리스마스에 블룸버그 뉴욕시장에게 '뉴욕시내에 우리 전기차를 깔자'고 편지를 써놨다. 딸들이 편지가 너무 딱딱하다고 해서 다시 편지를 정리하고 있는데, 거기서 편지가 온 거다. 거기서 99년간 땅을 임대해주고, 건물 지을 돈을 주겠다고 한다. 우리는 운영비를 내야 하는데, 연간 1000억원은 들어갈 거다. 정부와 기업에서 도와주면 가능할 것 같다."
―다른 데가 아니고 왜 KAIST인가.
"스탠퍼드도 초청받았는데 안 가겠다고 했다더라. 거긴 이미 서부에 있으니까. 그런데 자기가 내 입장이라면 들어갈 거라 하더라. 세계 중심부에 캠퍼스가 있다는 거는 의미하는 바가 크다는 거다. 우리가 뉴욕에 자리를 잡았으면 인천 송도에 외국 학교가 많이 들어왔을 것이다."
―이스라엘 대통령도 방문했었다.
"처음 왔을 땐, 너희가 뭘 하겠느냐 그런 태도였다. 대공원에서 전기차 타더니 달라지더라. 거기 전기자동차는 무지막지한 배터리를 싣고 다닌다. 우리는 정말 우아한(elegant) 솔루션 아닌가."
◆난 개혁에 매달리는 게 아니다
―계속 시스템 개혁에 집착하는 이유는. 한국이 그렇게 '개판'인 것 같나.
"그렇지는 않다. 미국서도 MIT에서 시스템 고쳐야 한다니까 4개월 만에 학과장 그만두라는 사람이 반이었다. 그러나 내 경험상, 목적이 옳으면 성공한다. KAIST가 세계 최고 대학이 된다는 목표는 옳다. 그러니까 그것은 성공한다는 것이다."
―카이스트 개혁이 인생에서 무엇인가.
"개혁을 위해서 개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개혁하는 거다. 난 KAIST 개혁이 아니라 세계 최고 대학을 만들러 온 거다. 과거의 방법으론 안 돼서 새 방법 쓰는 건데 그걸 남들이 개혁이라고 부른다. 한국에도 세계 최고의 대학이 나와야 한다. 그래야 한국 사람이 잘살고, 다른 나라 사람도 잘살지 않나. 인류를 위해서 내가 그런 것을 해야 한다."
―KAIST가 한국 대학이라 더 애정이 많나.
"그럴 수도 있겠지만 다른 나라 대학에서 그런 제의가 왔다 해도 내가 수락했을 것이다. 그런데 하긴 미국서 태어나 한국말 못하는 손자들도 김치 잘 먹고, 한국 축구 응원하는 것 보면 한국 피가 흘러서 그런 것 아니겠나."
―그때 좀 너그러웠어야 했다 한다든가 하는 순간이 있나. 욕먹는 것도 지겹지 않나.
"욕먹으면 오래 산다더라."
―새벽 3시에 메일을 보내도 답장을 한다는데, 원래 강골인가.
"운동을 따로 하지는 않고, 일을 익사이팅하게 해서 힘이 나는 것 아니겠나. 일할 때 사심은 없다. KAIST 한번 잘 해보겠다 하는 욕심은 있어도."
―이번 임기 마치면 뭐 하실 건가.
"놀 거다."
―그냥 노실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