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사회

정원사의세계, 사냥꾼의 세게

때에 따라 체인지하라 2011. 7. 21. 11:03

운명의 횡포가 가진 돌연성과 불규칙성, 그리고 어떤 방향에서도 나타날 수 있는 고약한 능력, 이 모든 것이 그 횡포를 예측할 수 없게 만들고, 따라서 우리로 하여금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만든다.”(지그문트 바우만, ‘모두스 비벤디’ )

문제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생존’이다. 세계는 ‘의자 뺏기 놀이’ 중이다. 왜 삶이 갈수록 힘들어지는가? 왜 일자리는 줄고 살림은 피지 않는가? 왜 열심히 일해도 빚에서 헤어날 수 없는가? 왜 가난한 사람은 계속 가난하고 부자들은 더 부자가 되는가? 지나친 유동성의 증가가 문제다. ‘지구화’와 ‘개방성’도 이 유동성의 확산에 힘을 보탠다. 좋은 것도 지구화의 물결을 타고 퍼지지만 나쁜 것도 함께 퍼진다.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근대성이 만든 견고성들이 해체되면서 액체화하고, 세계가 어떻게 ‘고형적’ 국면에서 ‘유동하는’ 국면으로 바뀌는가를 조목조목 짚는다. 땅이 물렁물렁해지면 그 위에서는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 자유주의적 지구화, 국제금융 시스템의 불안정성, 통제 불가능한 시장의 변덕, 국수주의, 테러리즘의 위험성들로 사회적 토대가 물렁물렁해진다. 땅이 언제 푹 꺼질지 모른다. 세계가 더 큰 유동성으로 떠밀리면서 개인들의 삶 역시 불확실성과 불확정성의 영역으로 떠밀린다. 그 결과는? 비정규직과 백수, ‘88만원 세대’들이 양산되고, 전반적으로 삶의 질이 떨어진다. 불행한 조건들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는 이들은 ‘난민’들 혹은 ‘잉여인간’이 될 가능성이 그만큼 높다.

‘난민’들은 제가 살던 나라에서 강제로 추방되었거나 자발적으로 더 나은 삶을 위해 도망쳐 나온 사람들이다. 그들을 받아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그들은 거부되는 존재다. 그들은 존재하지만 존재 그 자체가 끊임없이 부정당한다. 정착민도 아니고 유목민도 아닌 그들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 곳’이고, ‘비공간’이거나 ‘유령마을’이다. 한마디로 그들은 떠나온 곳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새로운 곳에서 둥지를 틀 수도 없다. 푸코의 기발한 용어를 빌리자면 그들은 ‘바보들의 배’에 승선한 것이다. 그것은 “홀로 존재하지만 폐쇄되어 있는 동시에 바다의 무한성 속에 묻혀 일정한 장소 없이 표류하는 장소”를 가리킨다. 대개의 난민들은 임시 체류지에 머무는데, 우리는 그곳을 ‘난민 수용소’라고 부른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제 나라 제 땅에서 ‘난민’ 신분으로 전락하고, 세계 자체가 유동하는 근대성으로 요동치는 가운데 거대한 ‘난민 수용소’로 변질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난민’들은 바로 우리의 이웃들이다. 그들은 부유한다. 직장을 잃고, 비정규직으로 살아야 하고, 혹은 백수로 어떤 “사회적 역할이라는 닻도 없이” 표류하면서. 해고 노동자나 문 닫은 영세자영업자, 최저생계비 이하의 삶에 허덕이다가 신용불량자로 밀려나는 사람들은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경제 ‘난민’들이다.

세계는 점점 ‘지옥’으로 변한다. 그 ‘지옥’을 만든 것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 소설가 이탈로 칼비노는 이렇게 적는다. “우리는 날마다 지옥에서 살고 있고 함께 지옥을 만들어 가고 있다.”고. 지옥은 삶의 불확실성에서 오는 위험과 공포로 가득한 삶 자체다.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 세계무역기구 등은 물론이거니와 국가도, 사회도 이 위험에서 우리를 지켜줄 수 없다. 사람들은 근대 세계가 인간을 공포로부터 해방시켜주리라는 기대를 품었다. 그것이 가망 없는 꿈이었음이 드러났다. ‘공포’는 여전히 우리 앞에 있다. 공포 앞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은 두 가지다. 하나는 도망가기. 다른 하나는 맞서 싸우기. 도망가기는 쉽지만 맞서 싸우기는 어렵다. 공포는 불확실성에서 오고, 우리는 위협의 정체를 모른다. 그것에 대처해 싸울 방법도 없다. 더구나 공포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기 스스로 부피를 키우는 자기생성적인 성질을 갖고 있다.

“일단 인간 세상에 들어오면 공포는 자체의 추진력과 전개 논리를 갖게 되어 관심과 투자가 없어도 계속 성장하고 확산된다.”(바우만, 앞의 책)

왜 한번 생겨난 공포는 쉽게 사라지지 않고 계속 성장하고 확산되는가? 공포는 안개와 같이 일상 속으로 스며든다. 공포는 외부의 에너지 투입 없이도 스스로를 재생산하는 성질이 있다. 사람들은 현실화한 공포에 대해 ‘방어적인 행동’을 취한다. 그러면 “공포와 공포로 인해 유발된 행동들”은 서로 뒤얽혀 공포를 재생산하는 메커니즘으로 발전한다. 공포는 자기 꼬리를 먹고 계속 자라나는 우로보르스와 같다.

은유를 빌려 말하자면, 근대는 정원사의 시대였다. 유토피아의 꿈이 그나마 남아 있던 시절이다. 정원사는 자신의 정원을 잘 가꿈으로써 유토피아의 꿈을 추구할 수 있었다. 정원에 식물들을 배치하고, 불필요한 잡초들은 제거한다. 그렇게 정원사는 유토피아 창조자의 길을 갈 수 있었다. 탈근대의 시대는 사냥꾼의 시대다. 사냥꾼 앞에 놓인 선택지는 둘이다. 사냥꾼이 되느냐 사냥감이 되느냐. 달리 말하면 죽이느냐 죽느냐다. 살벌하다. 이런 사회는 ‘위험사회’다. 위험이 도처에 깔린 세계는 곧 ‘지옥’이다. 이것이 진짜 ‘지옥’인 이유는 또 다른 데 있다. 사냥이 사냥감을 잡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원사에게, 유토피아는 길의 끝이었다. 그러나 사냥꾼에게는 길 자체다. 정원사는 길의 끝을 유토피아의 정당화이자 궁극적 승리로 생각했다. 반면 사냥꾼에게, 길의 끝은 이미 삶의 현실이 된 유토피아의 종착점이자 수치스러운 패배이다. 한술 더 떠서 개인적인 실패를 보여 주는 꼼짝 못할 증거와 완전한 개인의 패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사냥꾼들이 사냥을 그만둘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사냥에 참가하지 못하면, 자기만 배제되었다는 수치심과 따라서 (추측건대) 자기만 능력이 없다는 무력감을 느낄 수 있다.”(바우만, 앞의 책)

사냥꾼의 유토피아는 저기 멀리 있는 것이 이미 현실 안에서 실현된 그 무엇이고, 그것은 불멸이다. 문제는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끝이 없는 사냥에 나서야 한다는 점이다. 한 개별자가 사냥을 그만두는 순간 개인의 수치스러운 패배로 귀결되며 사냥꾼의 유토피아는 즉각 종결된다. 그는 곧 바로 유토피아에서 밀려나올 것이다. 사냥꾼의 유토피아는 사냥이 계속되는 한에서만 지속가능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선택지는 죽이거나(사냥꾼), 아니면 죽임을 당하거나(사냥감) 둘 중의 하나다. 용케도 사냥꾼이 되었다고 해도 악몽은 종결되지 않는다. 사냥은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계속되어야한다.

“끊임없이 계속 사냥에 참여하는 삶이 또 다른 유토피아라면, 그것은 (과거의 유토피아와는 반대로) 끝이 없는 유토피아다. 사실 정통적인 기준으로 보면 기괴한 유토피아다. 본래 유토피아는 고생이 끝날 것이라는 약속으로 사람들을 끌어당겼다. 이에 반해 사냥꾼의 유토피아는 고생이 결코 끝나지 않는 꿈이다.”(바우만, 앞의 책)

우리가 사는 세계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사회다. 눈을 크게 뜨고 보라. 그것은 지옥의 유토피아거나 유토피아의 지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