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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년 미래기술

때에 따라 체인지하라 2011. 9. 21. 14:59

    
미리보는 2030년 과학기술의 세계
◆2030년 미래 시나리오◆
값싼 인공혈액 누구나 이용할 수 있고 디지털안경이 삼라만상 정보 전하죠
   


본 내용은 과학기술부에서 시행한 종합조정사업인“2007년 기술예측조사 수정₩보완 연구”를
기반으로 2030년 과학기술 발전으로 변화된 미래사회 모습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시나리오
형식으로 재구성한 것임.
본 시나리오 내용을 사용할 때는 반드시 과학기술부에서 시행한 연구 결과임을 밝혀야함.

CONTENTS
| 제1장|
과거에서 온 사람
| 제2장|
유비쿼터스 세상
| 제3장|
세상을 되살리는 법
| 제4장|
북으로 가는 기차
| 제5장|
장애가 장애가 아닌 사회
| 제6장|
우리는 모두 이어져 있다
주요등장인물:
김래미 : 30세, 기술 심리학자. 기술과 인간의 조화를 추구하는 일을 하고 있다. 주로 재택근무를 하며
회사나 개인의 의뢰를 받아 기술심리 상담을 한다.
구형인 : 40세, 22년간 식물인간이었다가 깨어난 사람. 22년간 식물인간 상태였기 때문에 20대 청년
처럼 사고한다. 옛날 사람의 사고방식이라 2030년의 가치관이나 테크놀로지에 대해 비판적이다.
김래미의 상담을 받으며 2030년의 세계에 관해 토론을 벌인다.
그 밖의 인물:
신유식 : 김래미의 남편, 33세, 산악구조요원이며 환경운동가. 지방출장을 많이 다니지만, 늘 가족과
홀로폰으로 연락하기 때문에 같이 사는 것처럼 느낀다.
신하늘 : 첫째, 아들, 10세. 귀가 들리지 않지만 불편 없이 살고 있다.
신 별 : 둘째, 딸, 9세. 육아로봇‘북실이’가 키웠고, 가상세계와 현실세계와의 차이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신국한 : 김래미의 시아버지, 70세. 치매증세가 왔지만 기억력증진 치료를 받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시력상실 이후 시력보조기구를 쓰고 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위대한 시대에
살고 싶다고 생각해 왔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처럼
대단한 일이 일어나는 시대에
그리고 갑자기 깨달았다
이 시대가 위대한 시대라는 것을...
- 벤 샨
B제1장 B
과거에서 온 사람
과거에서 온 사람
(프롤로그)
잠에서 깨어난 김래미는 어쩐지 주위가 좀 부산하다고 생각했다. 가습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고,
어제보다 방이 좀 덥고 침대가 풍성하게 솟아 있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주인님.”
래미는 처음 듣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서 요새 아이들에게 인기 있는 아이돌 여가수가 웃
으며 인사하고 있었다. 래미는 잠깐 당황했지만, 곧 어찌된 일인지 깨달았다.
‘하늘이 이 녀석, 또 유비 그래픽 데이터를 바꿔 놨어.’
유비란 그녀 집의 전자 비서 이름이었다. 그녀가 침대를 툭툭 두드리자, 유비가 래미의 의문을 알아
채고 서둘러 설명했다.
“밤새 기침을 좀 하셨어요. 온도를 조금 올려 두고 가습기를 틀어 놓았습니다. 괜찮으시면 한 동안 이
대로 놓아둘까요?”
“그래.”
‘점점 눈치가 빨라지네.’하고 생각한 래미는 피식 웃었다. 유비의 눈치가 빨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
이었다. 유비는 진화하는 인공지능을 갖추고 있고 주인의 표정과 행동이 뜻하는 의미를 매일 조금씩
습득해가고 있었으니까.
“뭐가 우스우신가요?”
유비의 질문은 꽤‘적절한’반응이었다. 유비의 언어 데이터를 만드는 일에 그녀도 참여했었다. 유비
는 사람의 표정과 신체상태를 감지한 뒤에 자연어처리로 적절한 대화를 해 준다. “오늘 날씨가 좋아
2008년 남자와 2030년 여자 03
요.”“괜찮으세요?”“기분이 안 좋으신가요?”처럼 보통사람이 으레 하는 단어들. 프로그램 된 말을 반
복할 뿐인 장난감이라고 비웃는 사람도 있지만, 정서적인 안정효과가 있다는 통계가 있다.
‘좀 더 친근하게 대사를 바꿀 필요가 있겠어. 그러니까, <괜찮아요?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은데, 어
제 무리하셨나요?>라든가. 좀 더 자연스러운 말은 없을까? <주인님>이라기보다는 친구처럼 이름을 부
르는 건 어떨까?’
래미는‘이런 생각이나 하니 효과가 없지’하고 다시 웃었다.
“왜 혼자 웃는 거야?”
남편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바람에 래미는 옆을 돌아보았다. 남편인 신유식이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어쩐지 그가 있는 공간만 이 방과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남편의 등 뒤로 해가 뭉실뭉실
뜨고 있고, 주위에는 작은 나무와 풀꽃마저 보였다. 잠깐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던 래미는, 남편의 형상
이 3차원 화상통화 영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지금 북한산 어딘가에서 일하는 중일 것이다.
“언제부터 내가 홀로폰을 켜 둔 거야?”
“어제 저녁부터.”
“왜 끄라고 하지 않았어?”
“야근하는 데 심심했거든. 자는 당신을 구경하면서 일하니까 힘이 나더라고. 자, 아침 키스.”
남편의 입술이 뺨에 닿는 감촉이 그대로 전해졌다. 요즘의 홀로그램은 3차원 입체 영상과 함께 간단
한 촉감까지 지원한다. 남편은 산악 구조요원이자 환경운동가로 활동하고 있어서, 1년의 대부분을 떨
어져서 보내지만, 떨어져 있다는 생각은 잘 들지 않는다. 래미는 하루의 많은 시간을 남편과 함께 보낸
다. 비록 홀로폰을 통해서지만...
“주인님, 고객께서 통화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침인데? 나중에 통화할게.”
“예약 시간을 입력해 주세요. 상대는 한 시간 이내에 전화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오늘 이내가 아니라 한 시간 이내라? 성격이 급한 사람인가 보네.
“30분 뒤로 약속을 잡아 놔.”
04 1. 과거에서 온 사람
상대에게서도 허락의 답변이 왔다. 아직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래미는 문득 전화 통화 전에 허락을 구하고, 예약 시간을 전하는 전통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생각해
보았다.
3차원 화상통화가 대중적으로 보급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고도의 해상도와 오감을 지원하는 입체
영상을 통한 접속은‘통화’라기보다는‘만남’에 가깝다. 그래서 급한 전화가 아니면 상대가 옷매무새
를 가다듬고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미리 알려 주는 것이 예의가 되었다. 과거의 전화가 받는 사람의 편
의를 고려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합리적이라고 해야 할까. 서로의 영역을 침해하기 쉬운 시대이니
만큼, 더 세심하게 존중해줘야 하는 것이다.
2008년 남자와 2030년 여자 05
그녀의 침대 옆에서 딸 별이는 육아로봇1)인 북실이 품에 안겨 자고 있었다. 별이는 자기 침대보다 북
실이의 품 안을 더 편하게 여기는 것 같다. 최근에는 이 육아로봇을 주인공으로 하는 아동용 애니메이
션이 제작되었는데, 아이들 사이에서 굉장한 인기를 누렸다.
‘이 녀석이 없었다면 별이를 키우는 건 정말 힘들었을 거야.’
래미는 생각했다. 북실이는 별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가족의 한 사람처럼 그녀를 도와주었다. 첫째인
하늘이를 가졌을 때엔 아직 육아로봇이 대중화되지 않아서, 아이의 건강과 기분상태를 실시간으로 알
려주는 감성 기반 프로그램을 컴퓨터에 설치했었다. 이 프로그램은 하늘이의 상태를 감지해서“엄마,
배가 고파요.”“엄마, 안아 줘요.”라는 글씨를 띄워주었다. 그럴 때엔 마치 아기가 컴퓨터를 통해 엄마
와 대화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애완동물용 프로그램도 있어, 애완동물과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종종 들었다.
“우리 엄마 세대는 기계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아이들이 뭘 원하는지 알 수 있지 않았을까?”
래미의 말은 신유식이 갖고 있는 카드형 디스플레이에 문자로 전달되었다. 문자로 대화하는 방법은
고전적이었지만, 일을 하면서도 주변에 티가 나지 않게 대화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글쎄, 엄마들도 나름대로 고생하셨을 거라고 생각해.”
유식의 메시지가 벽면의 디스플레이에 떠올랐다.
“그래도 최소한의 노력은 했겠지. 아기의 얼굴을 하루 종일 살피면서 뭘 원하는지 알아내려고 했을
거야.”
“인간이 기계에 의지하는 문제는 주판이 발명되었을 때부터 있던 일이야. 그리고 그런 문제를 해결
하는 게 당신이 하는 일이잖아.”
“음, 그럴지도.”
래미는 아침 조깅을 할 생각으로 러닝머신 위에 올라간 뒤 쥐라기공원 가상현실로 들어갔다. 사방에
서 달려드는 공룡들을 피해 이리저리 달리는 게임이다. 앞쪽에서 벨로시랩터가 무리를 지어 달려드는
06 1. 과거에서 온 사람
1) 육아로봇 : 이 이야기에서는 감성기반 기술을 이용한 육아로봇을 상상하였다.
이 육아로봇은 아기의 체온 변화, 땀을 흘리는 정도, 혈압, 맥박 등 사람이 알아내기 힘든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여 기저귀를 갈아야 한다는
것을 혹은 배가 고프다는 것을 알아내어 엄마에게 알려준다. 주위에 엄마가 없을 때엔 직접 기저귀를 갈아주거나 우유를 데워 먹여 줄 수
도 있다. 아기의 신체에 위험이 왔다는 판단이 서면 가까운 응급센터로 연락하는 기능도 있다.
가 하면, 하늘에서 티라노사우루스의 발이 내리꽂히기도 한다. 나뭇가지나 돌부리도 공격해 온다. 그
녀는 몇 번 나무 사이로 점프하다가, 늘 걸리는 부분에서 막혀서 호수로 떨어졌다. 하지만 이렇게 이십
여 분 정도 달리고 나면 몸은 땀으로 흠뻑 젖는다.
샤워를 끝낸 래미는 디지털 안경을 쓰고 의자에 앉았다. 홀로폰 대신 인터넷으로 접속할 생각이었다.
인터넷으로 들어가면 아바타를 쓸 수가 있다. 그녀 대신 가상 캐릭터가 상대에게 나타날 것이다. 상대
가 누군지도 모르는 이상 굳이 내 모습을 직접 보여줄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눈앞에 작은 방 모양의 가상현실이 나타났다. 잠시 기다리자, 드레스를 입고 다소곳이 앉아 있는 노
부인이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제가 아침부터 실례를 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군요.”
전화의 시작이“여보세요”가 아니라“안녕하세요”로 바뀐 것만으로도 이 접속이 통화보다는‘직접
만남’에 가깝다는 것을 뜻한다.
래미는 자신의 프로그램을 가동시켰다. 감성 기반 컴퓨팅 기법에 의거하여, 상대의 얼굴과 표정과
몸짓을 살펴 상대의 마음을 읽어 주는 프로그램이다. 상담 자격증을 가진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것으
로, 일반인에게는 판매되지 않는다. 패널에는 <김 여사는 걱정이 많습니다.>라는 글씨가 찍혔다. <김
여사는 교육받은 중산층 이상의 사람입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라는 글씨도
찍혔다.
‘옛날 상담사들은 기계의 도움 없이 이런 것을 파악할 수 있지 않았을까.’
래미는 다시 한 번 생각하다가, 마음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인간의 능력을 보조하는 기술은 늘 양날의 칼이야. 인간의 삶을 확장시켜 주지만 한편으로 게으르
게도 만들지. 간단하게 생각해 보면 휴대폰이 없던 시절에 사람들은 웬만한 전화번호를 외우고 다녔으
니까.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수만 문장의 책을 줄줄이 외웠던 음유시인이나 학자도 사라졌지. 하지만
무선통신과 인쇄술은 자신들이 없앤 것을 보상할 만한 성과를 인류에게 가져오지 않았던가.’
“의뢰하고 싶은 일이 있어요. 먼저 복지센터에 의뢰를 했는데, 그곳에서 선생님을 추천해 주시더군요.”
2008년 남자와 2030년 여자 07
무슨 문제이기에? 보통 그녀에게 일을 의뢰하는 사람은 벤처 사업가나 기술자들이다. 새로 나온 상
품을 시판하기 전에는 그녀와 같은 사람의 상담을 거쳐야 한다. 하지만 이 노부인이 무슨 상품을 개발
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제 아들 문제예요.”
<이분의 아들은 건강에 문제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라는 글씨가 패널에 떠올랐다. 가끔 이 프로그램
의 통찰력은 그녀가 따라가기가 버거울 정도다.
“제 아들은 22년 전에 교통사고를 당했죠. 오랫동안 식물인간인 채로 지냈어요. 당시 의사들은 가망
이 없다고 했지만 우리 부부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죠.”
김 여사는 그때의 일이 떠오르는지 잠깐 눈시울을 적셨다.
“그러기를 잘 했죠. 제 아들은 줄기세포를 통해 죽은 뇌를 복원했고, 나노봇으로 망가진 신체 기능을
되돌렸어요. 이제 완전히 회복되었죠.”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그게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아시다시피, 세상이 좀 많이 변했어야죠. 아들은 도통 요즘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어요. 우리 형인이 입장에선 2008년에 잠깐 잠이 들었는데, 깨어보니 22년 후의 세상에 떨
어진 거죠. 병원에서 퇴원한 뒤로도 방에서 나갈 생각을 안 해요. 세상이 무섭다는 거예요.”
김 여사는 조금은 의심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센터에서 말하기를, 선생님이 이런 문제의 전문가라고 하더군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 정신과 의
사……?”
래미는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직업상 흥미가 동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드님과 통화할 수 있을까요? 아니, 그러니까,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그러도록 하죠. 안 그래도 준비하고 있으라고 했어요.”
김 여사는 잘 부탁해달라는 인사와 함께 접속을 끊었다. 래미는 기다리는 동안 채널을 직업용으로 전
환했다. 그러자‘구형인’이라는 이름과 함께 김 여사가 말한 대로의 의료기록이 전해졌다. 래미는 서
08 1. 과거에서 온 사람
둘러 옷을 갈아입고, 아바타 대신 진짜 모습이 전해지도록 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남자가 접속했다. 남자는 잠옷을 입은 채였고, 면도도 하지 않고 이불을 어
지럽게 편 방구석에 앉아 있었다. 무례한 일이었지만 옛날 사람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해할 수도 있
었다. 40대쯤으로 보였지만 분위기는 20살 정도로 보였다.
구형인은 뚱한 얼굴로 래미를 쳐다보았다.
<구형인 씨는 당신을 싫어합니다.>
<구형인 씨는 상담을 원하지 않습니다.>
<구형인 씨는 더 자고 싶어 합니다.>
패널에 연이어 문자가 찍혔다.
“정신과 의사는 싫어요.”
형인은 아이처럼 투정을 부렸다.
“전 정신과 의사가 아니에요. 기술 심리학자2)예요.”
“그게 뭐죠? 미안해요. 처음 듣는 말이라서. 요샌 처음 듣는 말이 너무 많아요.”
“과학기술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고, 인간에게 가장 좋은 방향으로 진행되도록 하는 학문
이에요. 기술이 사람의 정서에 불편을 주지 않고 자연스럽게 생활에 녹아드는 방법을 연구하죠.”
<구형인 씨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구형인 씨는 관련지식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2008년 남자와 2030년 여자 09
2) 이 이야기에서 가상으로 설정한 직업이다.
2008년에서 온 사람이라. 래미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때 래미는 8살이었다. 그 당시에 있었던 게 뭐
였더라? 1960년대의 사람에게 PC를 설명하려면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생각하는 기계?‘ 뭐 이것저것
다 되는 종합기계죠. 영화도 보고, 음악도 듣고, 게임도 하고, 글도 쓰고……, 아무튼 안 되는 게 없어
요.’그러면 그 사람은 뭐라고 말할까?‘ 예끼, 그런 황당한 거짓말은 하지도 마!’
“왜 그런 분야가 필요하죠?”
“과거에도 필요했어요. 과거에는 여러 분야의 학자들이 모여서 그런 문제를 토론했었죠. 현대과학기
술은 너무 빨리 발전하고 있어서 생활을 더 낫게 하는 이면에, 한편으로 사람들에게 불편과 충격을 주
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 것을 줄이는 일을 하죠. 프라이버시 침해를 받아들이면서도 편의성을 받아들
일 것인가, 자신이 운전한다는 심리적 안정감을 포기하면서 자동운전 차를 이용할 것인가, 로봇에게
10 1. 과거에서 온 사람
일을 맡기면서도 사람이 자신의 영역을 빼앗겼다는 기분을 받지 않게 할 수 있는가.”
래미는 말을 이었다.
“이를테면, 의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은 형인 씨의 유전자 정보를 이용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 이외의
용도로 일반에게 공개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어요. 사람들에게 심리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거든요. 그
런 법안을 만드는 데에도 관여하죠.”
“뭐, 좋아요. 그럼 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나요?”
“정확히 어떤 점이 불편하죠?”
“뭐랄까, 선생님은 그러니까…… 어디에 살죠?”
“평창이에요. 강원도죠. 요즘에는 많은 사람들이 시골에서 살아요. 지역이나 공간이 큰 문제가 되지
않거든요.”
“난 서울이죠. 그런데 지금 우리 둘은 꼭 한 방에 있는 것 같아요. 이런 게 혼란스러워요.”
“그냥 화상통화일 뿐인데요.”
“지나치게 현실감이 나요. 그것뿐이 아니에요. 깨어난 뒤로 수백 명을 만났어요. 예, 이런 식으로 가
상현실을 통해서요. 내 기사를 신문에서 보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당황스러운 건 그 사람들은 자기 나
라 말로 하는데 나는 그걸 다 알아듣는 거예요.”
“만국어 번역기를 쓴 거죠.”
“그게 기계번역이었다고요? 하지만 아주 자연스러웠는데요.”
“만국어 번역기는 2015년에 대중화되었고, 지금은 웬만한 중급 번역가 수준의 자연스러운 번역이 가
능하죠. 어느 나라의 사람과도 대화할 수 있어요.”
“그리고 약국에 갔는데, 처음 간 곳인데도 약사가 내 이름을 알더라고요.”
“아, 베리칩으로 읽은 거예요.”
“뭐로 읽었다고요?”
“형인 씨는 장기 환자였잖아요. 몸에 있는 아주 작은 칩에 형인 씨의 의료정보가 기록되어 있어요. 병
원 문을 통과하는 것만으로 의료정보가 전송되죠.”
2008년 남자 2030년 여자 11
“선생님은 이런 게 아무렇지도 않은가 봐요. 뭐랄까, 온 세상에 내가 공개되어 있는 기분이에요. 집
밖에 나가는 것도 무서워요. 그냥 내가 살았던 시대로 되돌아가고 싶어요.”
래미는 생각에 잠겼다.
“미래쇼크에 걸린 거예요.”
“무슨 쇼크요?”
“1970년에 앨빈 토플러가 썼던 표현이죠. 세계는 최근의 20년 동안 그 이전에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빨리 변했어요. 그 이전의 20년도 그랬고, 앞으로의 20년도 그럴 거예요. 그러다 보니 적
응하기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생겨나요. 형인 씨에게만 일어나는 일도 아니에요. 많은 사람들이 시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니까요.”
“전 20년이 지난다고 세상이 뭐 그렇게 바뀔까 생각했었는데요.”
“저도 그랬어요. 1980년대의 사람이 2000년대를 보았어도 비슷한 기분을 느꼈을 거예요. 제 느낌에
2000년대에서 2030년을 보는 느낌은 그보다 좀 더 커서 대강 1960년대의 사람이 2000년대를 보는
느낌과 같지 않을까 해요.”
<구형인 씨는 전화를 끊으려고 합니다.>
<구형인 씨는 전화를 끊으려고 합니다.>
패널이 경고했다. 안 돼. 난 이 사람을 붙잡아야 돼. 래미는 머리를 굴렸다.
“이렇게 해 보면 어떨까요? 오늘 내 채널을 계속 열어 두고, 홀로폰을 최대 해상도로 켜 두겠어요. 그
렇게 하면, 내가 사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을 거예요.”
“나보고 뭘 하라고요?”
“직접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 무섭다면, 남이 하는 것을 구경하는 쪽은 거부감이 덜할 테니까요. 언제
든 원하면 내게 말을 거세요. 오늘 종일 상담해 줄 테니까요.”
<구형인 씨는 황당해합니다.>
<구형인 씨는 당신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생활을 내게 다 보여주겠다고요?”
12 1. 과거에서 온 사람
“상담에 도움이 된다면요.”
“요즘 사람들 사고방식은 이상해요. 계속 정보 노출이 되는 사회라서 그런가 봐요. 나 같으면 누가 나
를 지켜보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거예요.”
<구형인 씨는 흥미를 느낍니다.>
“한 번 해 보죠. 어차피 할 일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설마 화장실에 갈 땐 꺼 둘 거죠?”
2008년 남자 2030년 여자 13
B제2장 B
유비쿼터스 세상
유비쿼터스 세상
(사회 / 문화)
“일어나셨어요, 엄마.”
래미가 가상현실에서 빠져나오자 별이가 인사했다.
“그래, 일어났니?”
별이는 자신의 수첩을 들여다보면서, 북실이와 함께 등교 준비를 하고 있었다. 별이의 전자종이에는
오늘의 시간표와 함께 예습할 간단한 내용이 다운로드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북실이는 전날 밤에
가방에 준비물을 집어넣어 주었을 것이고, 혹시라도 놓고 가면 별이가 집에서 멀어지기 전에 알려줄
것이다.
그러니 래미가 크게 신경을 써야 할 일은 없었다. 단지 별이가 자신보다 북실이를 더 좋아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길한 기분이 조금 들었다.
형인은 꾸깃꾸깃한 이불 위에 앉아서는 홀로폰을 어디에 놓아야 할지 한참 헤매었다. 그는 한참 방
향을 잡다가 TV처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TV화면이 펼쳐지듯이 래미의 집안이 눈에 들어왔다.
‘남의 집을 이런 식으로 구경하다니, 꿈에도 생각 못 해 봤는데.’
그는 정말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는 간신히 교통사고가 났던 지점만 기억할 수 있을 뿐이었다. 아
직도 자신이 2008년에 있는 것 같았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유행하는 게임기와 MP3플레이어를 사려
던 계획이 아직 기억에 생생했다. 그런데 깨어보니 2030년이라니.
래미는 부엌으로 들어서며‘커피’라고 말했다. 형인은 누가 안에 있나 싶어 부엌을 살폈지만, 누가
있는 기색은 없었다. 대신 식탁 위에 놓인 커피메이커가 저절로 움직이며 커피를 끓이기 시작했다. 창
문이 저절로 열렸고, 커튼이 걷히며 조명이 밝아졌다. 형인은 당황해하며, 대체 저 여자가 언제 저런
2008년 남자 2030년 여자 15
것들을 조정했는지 궁금해 했다. 그때 냉장고에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주인님, 계란과 파가 떨어졌어요. 두부와 콩나물은 유통기한이 다
되었으니 버리는 편이 좋습니다. 오늘 XX마트에서는 버섯과 생선을 할인합니다. 그리고…….”
“알았어. 모두 그대로 하고, 일주일치 장 봐 놔.”
“지금 누구한테 한 말이죠?”
형인의 놀란 목소리는 래미의 머릿속에서 직접 울렸다. 귀걸이를 통해서 뼈로 직접 전해진 목소리였
다. 뇌에 직접 전하는 목소리라 그녀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다.
“냉장고한테요.”
래미는 소리를 내지 않고 말했다. 그렇지만 그녀의 입 모양과 혀의 움직임, 얼굴 근육이 상대에게 내
용을 음성화해서 전했다.
“냉장고랑 이야기를 해요?”
“음, 유비쿼터스3)라는 말은 혹시 들어 보았나요?”
“예. 잘은 모르지만 들어 보기는 했어요.”
“2008년은 UC(유비쿼터스 컴퓨터)가 보편화되기 직전의 년도였으니까, 아마 형인 씨에게는 그 점
이 가장 다르게 느껴질 거예요. 지금은 UC 시대예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컴퓨터라고 생각하면
돼요.”
“장을 보라는 건 무슨 소리예요?”
“우리 집 냉장고에는 일주일이나 한 달치의 식단이 짜여져 있죠. 냉장고 안의 물품과 식단을 비교한
뒤에, 모자란 음식을 제가 즐겨 가는 마트에서 인터넷으로 자동 구입하죠.”
“냉장고 안의 물건을 냉장고가 어떻게 알죠?”
이런, 이 사람이랑 이야기하려면 한 걸음 걸을 때마다 한 보따리씩 설명해 줘야겠네.
“요즘 생산되는 모든 제품에는 RFID라는 무선주파수식별 태그가 붙어 있거든요. 이 태그에 식품에
관한 정보가 기록되어 있어요. 집안에 있는 물건의 위치를 모두 파악하는 것도 가능해요.”
16 2. 유비쿼터스 세상
3) 유비쿼터스 : 언제나, 어디에나, 모든 곳에 존재한다는 뜻. 컴퓨터를 쓰기 위해 명령어를 배우거나 마우스 쓰는 법을 배우는 대신, 그런 행
위가 자연스러운 일상에 녹아 있게 된다. TV를 켜기 위해서 리모콘을 찾는 대신 말을 걸거나, 혹은 그 앞을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좋네요. 전 항상 열쇠나 지갑이나 리모콘을 잃어버려서 애를 먹었거든요.”
“물론이죠. 지금은 그런 것을 쓰지 않지만.”
“지갑을 갖고 다니지 않나요?”
“반지나 목걸이 같은 것으로 대체되었죠. 피부 아래에 작은 칩을 넣기도 하고요.”
래미는 계속 설명했다.
“어디 보자, 지금 디스플레이를 켜면 유비가 신청한 목록이 출력돼요.”
형인은 방을 살폈다. 형인의 방은 부모님에 의해 20년 전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그의 눈앞에는
작은 브라운관 TV가 놓여 있었다.
“디스플레이라는 건 TV를 말하는 거죠?”
“TV라고요?”
래미는 그만 배를 잡고 웃었다. 형인은 눈을 깜박였다.
“내가 뭐 웃긴 말 했어요?”
“아녜요, 오랜만에 듣는 말이라서요. 지금은 그렇게 부르지 않아요. 사실 난 지금 형인 씨에 맞춰서,
가능하면 옛날 표현을 쓰고 있는 중이에요. 내가 요즘 표현으로 하면 형인 씨는 하나도 못 알아들을
거예요.”
‘1960년대 사람에게 컴퓨터를 기계상자라고 불러주는 것처럼 말이지.’
래미는 혼자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TV와 컴퓨터, 전화, 대부분의 가전제품은 하나로 통합되어 있어요. 모두 이어져 있죠. 아, 책도 전
자 텍스트로 전환되었으니 서재까지 포함할 수 있겠네요. 보세요.”
래미는 탁자 위에 펼쳐진 전자종이를 잘 보이도록 들어올린 뒤 손으로 건드렸고 전자종이에는 지금
막 산 물품목록이 떠올랐다.
“이것과 동일한 화면을 얼마든지 다른 매체로 볼 수 있어요.”
래미는 주머니를 뒤져 신용카드 크기의 전자종이를 꺼내 보였고, 거실에 있는 거대한 디스플레이도
가리켰다. 모두 같은 내용이 출력되어 있었다.
2008년 남자 2030년 여자 17
“냉장고, TV를 독립된 개체로 생각하지 말고, 모두가 하나의 유기체라고 생각해 보세요. 가정에 있
는 메인 서버 역할을 하는 주 컴퓨터가 두뇌고, 무선 통신망은 신경계고, 각 기기는 사람의 각 신체에
해당하는 셈이죠. 방금 한 말은 내가 냉장고에 대고 한 말이지만 그 명령은 두뇌에 해당하는 가정 서
버에 전달돼요.”
래미는 전자렌지 비슷한 물건으로 향했다. 형인이‘신기한 전자렌지일세.’라고 생각하는데 래미가
말을 이었다.
“이건 스마트 냄비라는 자동요리기계예요.”
래미는 스마트 냄비가 추천하는 오늘의 식단 중에서 김치찌개를 선택하고 버튼을 눌렀다. 냄비가 돌
기 시작하면서 재료가 순서대로 냄비에 떨어졌고, 전기 팬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맛은 있나요?”
형인은 좀 의심스러운 기분으로 물었다.
18 2. 유비쿼터스 세상
“이 냄비의 기본 세팅은 한국 최고의 요리사들이 해 놓은 건데요. 칼로리 계산도 해 줘요.”
“엄마가 해 주는 밥에 대한 낭만이 없어졌네요.”
래미는 꽤 당황했지만, 상대가 옛날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나도 엄마가 손빨래한 옷이나 손뜨개질하고 손바느질한 옷도 입어보지 못했어요. 그래도 불행하지
는 않았죠. 원하면 누구든지 손수 요리할 수 있어요. 중요한 건‘원하지 않는 사람이 하지 않을 수도’
있어야 하는 거죠. 현대사회에서는 여성의 가사노동을 완화시키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해요.”
형인은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아까 유비라고 했는데, 그건 뭐죠?”
“유비쿼터스 컴퓨터를 줄여서 부르는 거예요. 인격화해서 부르는 버릇이 들어서 그래요.”
“그런 식으로 기계를 인격화하는 게 요새 유행인가요?”
“인격화라.”
래미가 고민하는 것을 보니, 또 뭔가 자신이 뒤떨어진 말을 해 버린 모양이었다.
“기계는 생물이라고 불러도 좋아요. 그 정도로 진화되었죠. 지금은 철학적인 문제지만 앞으로는 당
연하게 받아들여질 거예요.”
무슨 이상한 소리람. 형인은 자신의 눈앞을 지나가는 거대한 벌레를 무심코 손으로 탁 쳤다.‘ 요즘
바퀴벌레는 크기도 하지.’라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딱딱한 금속의 감촉이 느껴지는 바람에 형인은 놀
라 손을 떼고 말았다.
형인이 눈을 부릅뜨고 벌레를 손으로 건드리자, 벌레는 깜짝 놀란 것처럼 옆으로 피했다.
“지금 이게 뭐죠?”
“뭐가요?”
“이상한 벌레가 지나갔어요! 금속으로 만들어진 것 같아요!”
“아, 청소로봇이에요. 때밀이 수건만큼이나 흔하죠. 하루 종일 집 안을 쏘다니면서 먼지를 닦아요.”
“하지만 방금 내가 건드렸을 때 살아 있는 것처럼 피했다고요!”
“그럴 거예요. 잠깐 들여다봐도 괜찮겠지요? 불편하지 않으면……. 어디 보자, 2세대 로봇이네요.
2008년 남자 2030년 여자 19
예, 그런 기능이 있어요.”
“2세대가 뭐죠?”
“인공지능의 단계를 말해요. 1세대가 곤충 정도의 지능을 갖고 있다면, 2세대는 학습을 할 수 있어
요. 우리 집에 있는 것도 같은 종류예요. 처음에는 가구 벽에 부딪치기도 하고, 탁자 위에서 떨어지기
도 했지만, 지금은 집안 구석구석을 다 알죠. 어디에 먼지가 많은지도 알고요. 하지만 그것도 상당히
구식 로봇이에요. 요즘 나오는 3세대 로봇은 어떻게 하면 인간에게 도움이 될까 먼저 궁리하죠. 학자
들은 이들을 새로운 형태의 생물로 불러야 한다고 말하고 있어요.”
“뭘 혼자 중얼거려요, 엄마?”
방에서 하늘이가 나오며 물었다. 래미가 그쪽을 돌아보자 형인도 그쪽을 돌아보았고,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으악, 사자예요, 사자! 사자가 있어!”
하늘이는 방에서 나온 사자의 등을 쓰다듬으며 어리둥절한 얼굴로 래미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 있어요?”
“옛날 분이랑 이야기하고 있어. 형인 씨, 저건 진짜 사자가 아니에요. 홀로그램 가상 애완동물이죠.
손으로 만져 볼 수도 있고 냄새도 나요.”
형인은 정말로 과거로 돌아가고 싶었다. 최소한 그때엔 방에 사자가 돌아다니진 않았는데.
형인은 목욕을 하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샤워기 아래에 서자 물이 쏟아져 나왔고, 형인이 뜨겁다
고 생각하며 온도를 조절하려는 찰나 벌써 물의 온도가 미지근해졌다. 형인이 당황해서 머리를 문지
르는 것을 멈추고 한 걸음 물러나자, 물은 저절로 멈췄다. 형인은 샤워기를 노려보았다.
“누군가가 저 안에서 날 지켜보고 있는 건 아니겠지?”
형인이 다시 방으로 돌아와 보니, 래미는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여전히 책은 있군요. 그나마 내게 익숙한 풍경이네요.”
“전자책이에요.”
래미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머리를 수건으로 마구 문지르던 형인은 래미가 시선을 돌리려 애쓰
20 2. 유비쿼터스 세상
는 것을 깨닫고, 왜 저러는지 이상하게 생각하다가 자신이 거의 벗고 있는 것을 깨닫고 허둥지둥 수건
으로 몸을 가렸다.
“말해 주든가요.”
“화상채팅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겠죠. 이해해요.”
이젠 사람들이 집 안에서도 외출복을 입고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며 형인은 래미가
‘전자책’이라고 말한 것을 바라보았다. 래미는 얇은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었다.
“그게 전자책인가요? 꼭 그냥 책처럼 보이는데요.”
래미는 책을 확대시켜 보여준 뒤 하단을 눌렀고, 책은 표지에서부터 안에 쓰인 글씨까지 순식간에
바뀌었다. 형인은 깜짝 놀랐다.
“이 안에는 수백 권 분량의 책이 저장되어 있어요.”
“전자책이 맞군요. 하지만 정말 종이 같은데요. 깜박이지도 않고, 빛도 나지 않잖아요!”
“맞아요. 디스플레이가 <깜박이지 않게 된 순간>에 종이는 역사의 무대에서 밀려났어요.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그것이 가장 큰 전환점이었어요. 예, 빛나지 않아요. 보통의 물건처럼 외부의 빛을 반사해
서 보게 하니까요. 그래서 눈이 피로하지 않죠.”
이제 아무도 종이로 된 책을 보지 않는다니! 꼭 오랜 친구가 사라져버린 것 같은데.
“난 책 읽는 것을 좋아했어요. 종이냄새도 질감도 좋아했어요.”
“전자책은 종이와 똑같은 냄새와 질감을 구현해요.”
“하지만 전력소비를 줄이려면 꺼야 하잖아요?”
“전하를 띤 미립자의 위치로 형태를 정하는 것이라 재배열에만 전력이 필요하지, 동일 화면을 쏘아
내 보내는 동안은 전력소비가 없어요.”
“그래도 진짜가 아니잖아요?”
래미는 형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민했다. 이 사람은 대체 뭘 진짜라고 하는 걸까. 어쩌면 상고
시대 사람에게 종이책을 보여주면, ‘책이 대나무로 만들어져 있지 않다니! 이건 진짜가 아니야!’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2008년 남자 2030년 여자 21
“예전에는 책을 찍어내기 위해 무수한 나무가 잘려나가야 했지요. 15년 전쯤에‘나무는 자원이 아니
라 자연이다’라는 모토와 함께 종이 대신 전자종이를 이용하자는 시민운동이 활발히 일어났어요. 책
의 질감을 느끼는 것보다는 나무 한 그루가 더 사는 게 낫지 않겠어요?”
형인과 대화하는 동안, 별이에게서 온 메시지가 거실 디스플레이에 떴다.
<잠깐 이야기하고 싶어요, 엄마.>
무슨 일일까? 래미는 시계를 보았다. 아직 수업시간일 텐데.
“수업 중에도 통화가 되나요?”
형인이 물었다.
“쉬는 시간일 거예요.”
아마도.
“애들 교과서는 교과 네트워크에만 이어져 있지만, 급한 일이 있으면 가정으로 연락할 수 있거든요.
어디 보자……, 체험학습 네트워크로 접속해달라고 하는군요.”
“교과서가 뭐에 이어져 있다고요?”
“음, 아이들의 교과서도 물론 전자책이고, 도서관과 지식정보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어요. 모든 단
어와 문장이 하이퍼링크화 되어 있어요. 수업은 보통 방대한 정보의 바다 속에서 선생님과 함께 토론
하거나 질문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죠.”
“체험학습 네트워크라는 건 뭐죠?”
“3차원 가상현실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네트워크예요. 가끔은 저도 즐겨요. 아주 재미있거든요.
제 암호를 가르쳐드릴 테니까, 한 번 들어와 보세요.”
형인은 익숙하지 않은 기분으로 탁자 위의 디지털 안경을 썼다. 안경에는 래미가 보낸 암호와 주소
가 떠올라 있었다. 이걸 어떻게 선택해야 할지 몰라 한참 헤매던 형인은‘눈으로 보기에 글씨가 떠올
라 있는 것처럼 보이는 지점’을 손으로 건드리면 된다는 것을 깨닫고 그렇게 했다.
형인이 네트워크로 들어가자, 눈앞에 밤하늘이 펼쳐졌다. 마치 공기 맑은 시골 들판에 서서 보는 것
처럼 쏟아질 듯이 빛났다.
22 2. 유비쿼터스 세상
“여기가 어디죠?”
“‘별자리’항목이에요.”
래미가 대답했다.
“지금 형인 씨가 있는 곳의 하늘을 실시간으로 돌려주죠. 별자리를 관측하러 여행을 떠나거나 천문
대에 갈 필요도 없어요. 일상기억이 논리기억에 비해 훨씬 정확하고 자세하고, 또 오래 저장된다는 건
알고 계시겠죠?”
“음, 몰랐어요.”
“한 번 가 본 도시 이름은 외워도 가 보지 않은 도시 이름은 외우기 어려워요. 한 번 이 공간에 와 본
아이들은 이 풍경을 기억하게 돼요. 이를테면, 지중해 도시에 가 본 아이들은 지중해 날씨가 어떻다고
외울 필요가 없어요.‘ 아, 그때 거기 어땠더라, 태양빛이 강렬했었지?’라며 기억을 더듬게 되는 거죠.”
래미는 몇 군데를 더 돌아 주었다.‘ 생물’항목에서는 인간의 신체를 탐사하는 곳으로 들어갔다. 그
가상현실은 혈관과 폐와 심장과 장을 동굴탐사를 하듯이 구경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역사’항목에서
는 정교하게 구현된 석기시대나 조선시대, 삼국시대의 거리로 들어갔다.
“놀랍군요.”
“‘놀면서 배운다’는 것이 최근 교육개혁의 방향이었죠. 이 교육 가상현실을 구현하는 사업이 국가사
업이면서, 전 세계적인 사업이기도 했어요. 사교육비도 많이 줄었지요. 가난한 아이라도 첼로를 사지
않고도 가상현실 안에서 첼로연주를 배울 수 있고, 산간오지에서도 서울에서 강의하는 선생님으로부
터 수업을 들을 수 있으니까요.”
래미는 말을 이었다.
“그 밖에도, 수업의 3분의 1은 1대 1 수업으로 진행돼요. 가상 선생님이 그 학생의 진도와 성취에 따
라 수업을 하죠. 집에서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을 반복 학습할 수도 있지요.”
“선생님의 역할이 줄어든 건 아닌가요?”
“사람이 해야 할 일은 더 뚜렷하고 명확해요. 기계의 인공지능(AI)은 아직 토론을 하고 상담을 해 주
고 사회성을 길러주고 인성교육을 해 주지는 못해요. 언젠가는 그것도 가능할 수 있다고 하지만……,
2008년 남자 2030년 여자 23
역시 심리적인 이유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사람이 기계에게 교육받기를 원하지 않는 한 그렇다는 거죠?”
“아뇨, 선생님이 되고 싶은 사람이 남아 있는 한요.”
형인은 나름대로 납득했다.
“세상은 급속도로 변하고 있어요. 2008년에도 책이 출간되어 나올 즈음에는 그 책에 있는 지식은
이미 낡은 것이 되고, 대학에서 배운 기술을 실제 사회에서 써먹지 못하는 건 흔한 일이었잖아요?”
“예, 그랬었죠.”
“그런데 지금의 발전 속도는 훨씬 빨라요. 당시의 교육방식이 지금까지 이어졌다면 공교육은 점점
자리를 잃어갔을 거예요. 기계가 교육의 일부를 담당하는 것은 교육이 빠른 속도로 업데이트될 필요
가 있기 때문이기도 해요.”
래미는 이야기에 빠져 학습 네트워크에 접속한 원래 목적을 잊은 것을 깨닫고, 얼른 별이의 위치를
찾았다. 별이는‘천문학’분야의‘태양계’지점에 있었다.
‘태양계’에 접속하자, 래미의 주변은 달 표면으로 바뀌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우주가 눈앞에 펼쳐
져 있었고, 멀리 파란 지구가 눈에 들어왔다.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영상이다. 실제 달에서 찍은 영상
을 토대로 만든 가상현실이었다.
원한다면 태양의 주변을 돌아볼 수도 있다. 태양 주위로 솟아오르는 이글거리는 불꽃, 수소폭발, 흑
점의 움직임을 손에 잡힐 듯이 관찰할 수도 있다. 가상현실이 아니면 경험할 수 없는 풍경이기도 하다.
래미가 잠시 기다리고 있자, 별이가 나타났다.
“수업시간은 아니겠지?”
“쉬는 시간이에요, 엄마. 물어볼 게 있어서요.”
별이는 뭔가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학업에 관계된 문제일까? 래미는 자신도 이런 환경에서 공부
할 수 있다면 정말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곤 하지만, 아이들은 그런 말에 툴툴거리곤 한다. 생각해 보
면, 모든 시대에는 그 시대에 사는 아이들의 고통이 있는 것이다. 그건 래미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문
제일 것이다.
24 2. 유비쿼터스 세상
“엄마, 난 매트릭스 병에 걸린 것 같아요.”
별이가 말했다. 래미는 조금 긴장했다. 매트릭스 병이라니, 그건 요즘에 유행하는, 현실과 가상을 구
분하지 못하는 병을 뜻한다. 작게는 드라마 속의 캐릭터를 진짜로 생각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현실에
서 가상공간처럼 함부로 행동하다가 사고를 내는 것에 이른다.
“얼마 전에 친구 집에서 강아지를 갖고 놀다가 다치게 할 뻔했어요. 진짜 강아지였는데, 난 그게 홀로
그램 애완동물이라는 착각을 하고 만 거예요. 가끔 길을 가다가 다리에서 뛰어내리면 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해요. 그럴 수 없다는 건 아는데, 가끔 그게 현실이라는 걸 잊을 때가 있어요. 나 괜찮은 걸까요?”
래미는 생각에 잠겼다.
“물론 괜찮지.”
2008년 남자 2030년 여자 25
“그냥 넘어가려는 거죠?”
“아이들은 다 그래. 엄마도 어렸을 때 동화책을 보고 개구리가 왕자님이 될 수 있다든가, 마법을 외
우면 하늘을 날 수 있다고 믿었었지. 그건 누구나 겪는 일이야.”
“엄마도 그랬다고요?”
“그럼.”
별이는 한참 생각하다가 그제야 웃었다.
“북실이는 이런 걸 가르쳐주지 않거든요. 북실이한테 상담했더니 매트릭스 병의 단어 정의나 읊지
뭐예요. 고마워요. 엄마.”
별이는 사라졌다. 다행이야. 엄마만이 할 수 있는 일도 있잖아.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것 같아. 래미
는 안도의 숨을 쉬고, 달에서 빠져나왔다.
“인상적이었어요.”
별이가 다시 수업으로 되돌아간 뒤에, 형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점이요?”
“우주가 아름다웠어요. 직접 가 보고 싶어요.”
“원한다면 데려가 줄 수 있어요. 우주 엘리베이터를 타면 우주 전망대로 갈 수 있어요.”
“우주 엘리베이터요?”
“예, 엘리베이터를 타고 대기층을 뚫고 우주까지 올라가는 거예요.”
“예에? 정말로요?”
“우주 엘리베이터를 처음 제안했던 사람은 아더 C 클라크라는 미래학자였죠. 그는 사람들이 그 생
각을 비웃지 않게 된 시점에서 20년쯤 후에 만들어질 거라고 했죠. 그게 지금이고요. 강철보다 훨씬
가볍고 강한 탄소 나노튜브의 개발로 가능해진 일이죠. 우주 전망대에서 본 지구는 장관이었어요. 다
시 한 번 가 보고 싶어요.”
“실제로 가는 것과 가상현실에서 가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요?”
“역시, 진짜는 진짜죠.”
26 2. 유비쿼터스 세상
B제3장 B
세상을 되살리는 법
세상을 되살리는 법
(자원 / 환경)
“이제는 사람들이 서로 직접 만나지 않게 되었나요?”
형인의 질문에 래미는 당황했다. 조금 전만 해도 래미는 회사에 들러 회의를 하고 돌아온 참이었다.
물론 3차원 네트워크를 통해서였지만.
“그게 무슨 소리죠?”
“친척끼리 모이지도 않나요?”
“아뇨, 자주 만나요. 오히려 너무 자주 만나서 탈인 걸요. 아침에 시아버님이 들르기도 하고, 식사
도중에 갑자기 고모님이 오시기도 하죠. 하루라도 누군가를 만나지 않고 지나는 날이 없어요.”
말이 끝나자마자‘잠깐 들러도 될까?’하는 시아버님의 메시지가 디스플레이에 떴다. 아버님은 텃밭
을 가꾸고 있던 중이었다.
시아버님이 콩 사이사이에 심고 있는 것은 토양오염 제거용 식물이었다. 시아버님의 옆에는 파라솔
처럼 보이는 것이 세워져 있었다.‘ 형인 씨가 저걸 본다면 뭔지도 모르겠군’하고 생각하니 래미는 절
로 웃음이 나왔다. 그 파라솔은 태양전지양산으로 주변의 농기계에 전력을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예, 무슨 일이세요?”
“오늘 소나기가 온다더라. 나갈 거면 조심하거라.”
래미는 접속을 끊은 뒤에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방금도 만났잖아요.”
형인은 무언가 불만스러운 듯한 얼굴을 하고 방에 나타났다. 그는 이제 옷을 좀 갖춰 입고 있었지만,
여전히 20년 전에나 쓰던 키보드가 있는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마우스를 움직이고 키보드를 두드
28 3. 세상을 되살리는 법
리는 모습이 꼭 옛날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래미가 왜 그걸 쓰느냐고 묻자, 형인은 편해서라고 했다.
“3차원 화상통화로 만나는 걸 말하는 거죠? 지금 나와 선생님처럼요. 하지만 그건 그냥 전화 통화일
뿐이잖아요. 진짜로 만나는 게 아니잖아요.”
래미는 계속 이 사람이 말하는‘진짜’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 사람은 혹시 걸어가지 않으면 진짜
이동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이 서로 만나기 위해 교통수단에 의지했던 시절에는 온 세상에 도로를 놓느라 자연을 파괴
해야만 했죠. 지금 우리는 모든 사람이 순간이동의 기술을 배운 셈이죠. 앉은 자리에서 온 세계와 소
통하니까.”
“그래도 뭔가 정이 느껴지지 않아요.”
2008년 남자 2030년 여자 29
어떤 점에서? 하지만 자신도 어렸을 때엔 그렇게 생각했던 것도 같았다. 그러고 보니 집 안만 보여
주는 것도 문제가 있기는 했다. 좀 나가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좋아요, 잠시 밖으로 나가 보죠. 어디 볼까……. 북쪽으로 가 보는 건 어떨까요?”
“북쪽 어디요? 의정부?”
“북한이요.”
형인은 놀랐다.
“북한으로 간다고요? 지금? 준비도 없이? 신고도 없이? 여권도 없이?”
“예전과는 달라요. 북한은 우리와 완전한 경제공동체를 이루고 있어요. 북한의 체제는 바뀌었고, 많
은 면에서 변해가고 있어요. 여행도 자유로워요. 내가 비무장지대에 있는 세계 최대의 고가도로를 구
경시켜줄게요.”
“고가도로요?”
“네, 비무장지대의 자연환경을 최대한 건드리지 않기 위해 철도를 고가도로로 건설했죠. 기차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정말 장관이에요.”
래미는 계속 설명했다.
“아마존의 구석구석과 남극과 북극, 해저까지도 인간의 손길이 안 닿은 곳이 없지만, 한국의 비무
장지대는 수십 년간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채 보존되어 왔죠. 다른 나라에서는 멸종된 것으로 보고
된 생물들도 살고 있어요. 지금은 학자들만이 제한적으로 출입할 수 있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보존되
고 있어요.
“관광지로 개발하면 굉장하겠는데요.”
“물론 일반인에게 공개된 지역에는 수많은 관광객이 몰리고 있죠. 하지만 생물 다양성이 파괴될
우려도…….”
“환경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네요. 하지만 그보다는 경제적 가치가 더 중요하잖아요?”
무심코 말해버린 형인은 상대의 반응에 당황하고 말았다. 래미가‘뭐 전 세대 사고방식’이라고 내
뱉을 것 같은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었다.
30 3. 세상을 되살리는 법
“예전 사고방식을 갖고 계시다면,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거예요. 아, 환경에 관해서는
제 남편과 통화하는 편이 좋겠어요. 남편이 전문가니까요. 그동안 전 나갈 준비를 하지요.”
래미는 접속을 끊었다. 혹시 화가 난 게 아닐까. 그런데 내가 무언가 잘못 말했나? 형인은 야단맞은
아이처럼 주눅이 들어서, 래미가 가르쳐 준 번호로 접속했다. 구릿빛 피부를 가진 건장한 남자가 홀로
그램 저쪽에서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전 금강산에도 자주 가요. 환경단체에서는 남북을 가리지 않고 일하거든요. 2000년대에도 금강산
여행은 할 수 있었던가요? 아, 2030년의 사람과 인사하시겠어요? 김치~”
신유식이 홀로폰을 이리저리 돌리며 주변을 보여주었다. 형인은 신유식이 서 있는 건물을 유심히 살
폈다. 주유소인 것 같기도 한데, 과거에 흔히 보던 주유소와는 어딘지 느낌이 달랐다.
“미래의 주유소는 이상하게 생겼네요. 기름은 어디서 넣어요?”
“주유소요?”
신유식은 호탕하게 웃었다.
“내가 뭐 웃긴 말 했어요?”
“아, 아녜요. 뭐라고 해야 하나, 핸드폰을 워키토키라고 부르는 거나
비슷하게 들려서요. 내 입장에선 핸드폰이라는 말도 웃기지만.”
“주유소라는 말을 이제 안 쓰나요?”
형인은 또 상대가 웃을까봐 걱정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제 없죠. 공중전화가 사라졌듯이 그렇게 사라졌어요.”
“그럼 어디서 차에 기름을 넣죠?”
“요새 차는 기름으로 가지 않아요.”
“그래도 설마 기름차는 있겠죠.”
유식은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해요. 기름은 바닥이 났으니까. 차에 넣을 정도로 남아돌지 않아요.”
“뭐가 바닥이 났다고요?”
2008년 남자 2030년 여자 31
“매장량이 고갈되었어요. 석유경제는 끝을 고했죠. 그런데 재미있네요. 그 당시에도 석유 매장량이
2,30년을 가지 않는다는 건 알려져 있었는데요.”
“그런 이야기는 많았죠. 흔히 돌던 이야기잖아요. 2070년에는 열대림이 소멸한다든가, 북극이 녹아
없어진다든가, 하지만 북극도 멀쩡하고, 아무 일도 없죠, 그렇죠? 아무튼 학자들은 겁주는 걸 좋아한
다니까요. 외계인이 쳐들어온다는 이야기나 비슷하죠.”
형인은 이번에는 정말로 말을 잘못했나 보다고 생각했다. 유식의 얼굴이 아주 심각하게 변했기 때문
이었다.
“전부 진실이었어요. 정말이지, 그런 사고방식을 가진 전 세대 때문에 우리 세대가 애를 먹고 있다
고요. 학자들이 정확한 예측을 내 놓아도 믿지 않았으니까요. 그 당시에 파괴된 자연을 되살리느라 요
즘 사람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알아요?”
“나를 전 세대의 대표로 몰지 말아요.”
“그런 사고방식이 지금까지 이어지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그랬다면 우리나라의 자연도 계속 파괴되
어 갔을 거고, 돌이킬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겠지요. 당신 말처럼 북극이 녹아 없어져 해안 국가가 물
에 잠겼을 수도 있고, 아마존 밀림이 사라져 사막이 되었을 수도 있죠. 온난화의 영향으로 해류의 흐
름에 혼란이 와서 북반구에 빙하기가 왔을 수도 있고요.”
“미안해요. 내가 좀 뒤떨어졌다고 해도 이해해 줘요. 옛날 사람이잖아요. 그럼 그 차는 뭐로 가는
거죠?”
유식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난 후,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며 말했다.
“수소연료전지를 쓰죠. 2000년도에도 일본에서는 시판되고 있었는데, 그땐 아직 대중화가 되지 않
았었나 보네요.”
“수소연료전지라는 말도 들어보기는 했는데, 정확히 뭐죠?”
“수소와 산소가 결합해서 물이 될 때 나오는 전기를 이용하는 전지예요. 이론은 200년 전에 이미 완
성되어 있었지만,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 문제였죠. 석유 매장량이 줄어들면서 유가가 하늘 높은 줄 모
르고 치솟았어요. 가장 비싼 대체재조차도 유가보단 쌌지요. 그래서 대체 에너지 개발이 폭발적으로
32 3. 세상을 되살리는 법
가속화되었죠. 석유경제는 끝을 고했어요. 지금은 수소경제 시대죠.”
“그럼 중동은 어떻게 되었죠?”
“가장 큰 변화를 겪은 곳이죠. 지금은 관광산업과 기술산업에 힘을 쏟고 있어요. 뭐, 사실 이 문제는
어느 나라나 비슷해요. 자원이 갖는 경쟁력이 사라졌으니까요.”
“무슨 뜻이죠?”
“E=mc2라는 말 알죠? 에너지는 질량에 광속의 제곱을 곱한 양이다. 질량을 가진 모든 물질이 에너
지를 갖고 있어요. 단지 기술력에 따라 그 자원에서 뽑아낼 수 있는 에너지양이 달라지는 거예요. 다
시 말하면, 지금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분자, 원자가 자원이에요.”
유식은 어깨를 들썩였다.
“이런 세상에서 경쟁력이 되는 것, 혹은 자원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
즉 정보와 기술과 지식이죠. 언젠가는 차에 물을 싣고 다니다가, 그 물을 태양열을 이용해 수소와 산
소로 전기분해하고, 이를 다시 합성하여 전기를 생산하고, 그 과정에서 생겨난 물을 재이용하는 기술
도 개발될 거예요. 그때 가면 충전소도 필요가 없겠지요.”
“흠, 다른 건 또 뭐가 있죠?”
“초기 단계지만 핵융합 기술도 있어요. 주로 태양광, 풍력, 여러 가지 재생 에너지를 쓰죠. 우리나라
는 세계 최고의 태양광전지 기술을 갖고 있어요. 시골에는 전기선을 들이지 않는 집도 있는 걸요.”
“그럼 전기를 어디서 얻죠?”
“자체 생산하는 거죠. 전원주택 지붕을 태양광 전지로 만드는 것도 유행이죠.”
“공해도 많이 사라졌겠네요.”
“물론이죠. 화석연료를 태우는 일은 가난한 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고, 그것도 범국가적인 지
원으로 거의 사라졌어요.”
형인은 생각에 잠겼다.
“전 솔직히 환경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유식은 잠시 생각해보다가 말을 이었다.
2008년 남자 2030년 여자 33
“2000년대 사람들이 환경 불감증에 걸려 있었던 까닭은 노력해 봤자 안 된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
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럴 수밖에 없었겠죠. 환경을 파괴하지 않으려면 당장 차도 굴리지 말아야
하고, 목욕을 하거나 세탁을 하지도 말아야 했을 테니까. 일상적으로 하는 일이 모두 환경을 파괴하는
일이었으니까요. 그런 상황에서는 눈과 귀를 막을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하지만 지금은 달라요. 환
경을 파괴하는 건 말 그대로 게으름에서 오죠.”
“하지만 결국 사람이 사는 곳에선 쓰레기가 생겨나잖아요. 어쩔 수 없다고요.”
“아, 정말로 옛날 사람이군요.”
“옛날 사람이라서 미안하네요.”
형인은 불만스럽게 말했다.
“미안해요. 하긴, 나도 어렸을 때엔 그렇게 생각했었는데요. 본래 생태계는 완전한 순환체계를 갖고
있어요. 동물이 식물을 먹고, 동물의 배설물은 미생물이 분해하고, 분해한 것은 식물이 먹고, 다시 동
물이 식물을 먹고……. 그런 과정이 수십억년이나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고요. 오히려 20세기의 인
간은 이러한 순환체계를 파괴하는 아주 이상한 상태에 놓여 있었던 거예요.”
‘이상한 상태였다고?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형인은 생각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요즘 환경 과학의 목적은 다시 인간사회를 이와 똑같은 완전한 순환체계로 바꾸는 거예요. 또 그렇
게 되어가고 있고요. 먼 훗날에는 20세기의 인간사회는 지구의 역사에서도 아주 특이한 시대로 여겨
질 거예요. 재생도 안 되는 물건을 만들어 내다니 참 기술력 모자라던 시대였지, 하면서요.”
형인은‘순환’의 문제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니까 커피 캔이나 버려진 가전제품이 비료로 쓰이게 만든다는 건가요?”
“그렇죠. 대부분의 물질이 썩는 제품으로 바뀌었고, 썩지 않는 것은 환경 나노봇으로 분해해서 자연
으로 돌려보내죠.”
“하지만 환경친화적인 산업은 돈이 들잖아요.”
34 3. 세상을 되살리는 법
“크게 생각하면 재생산되는 만큼 오히려 경제적이에요. 비환경물질을 생산하는 것은 비윤리적인 수
준을 넘어서, 요즘에는 범죄행위로 규정돼요.”
“그런데……. 잠깐만요, 당신 지금 운전대를 놓고 있잖아요! 이봐요! 조심해요!”
유식은 어리둥절해 하다가, 소리 내어 웃었다.
“자동운전 중이에요. 많은 차가 자동운전으로 가죠. 고속도로에서는 의무적으로 자동운전을 하게
되어 있고요. 자동차에 설치된 UC가 위치정보 시스템과 접속해서 스스로 길을 찾아가는 거죠. 우리
나라도 독자적인 위치정보 시스템이 있어요. 국산 인공위성 수십 기가 지구를 돌고 있죠.”
“위험하지 않나요?”
“2000년대에도 이미 있었던 걸요. 지금은 훨씬 안전하죠. 자동운전 자동차는 사람과는 달리 교통법
2008년 남자 2030년 여자 35
규를 절대 어기지 않아요. 교통정체도 옛말이 되었죠. 모든 차가 교통법규를 지키면 사실 정체될 일은
많지 않거든요.”
북한산에 도착한 유식은 자신의 작업장으로 가서 작업을 시작했다. 기계가 파낸 자리에는 옛 플라스
틱과 비닐봉지, 폐기물이 뭉쳐서 나오고 있었다.
“전 산악구조대원이지만, 평상시에는 이런 일을 하죠. 지금 생산되는 생활용품은 문제가 없지만, 과
거에 버려진 쓰레기는 여전히 문제죠. 이것을 처리하는 것도 국제적인 문제예요. 이들은 내버려두면
계속 남아 지구를 오염시킬 거예요.”
“뭘 뿌리는 거죠?”
“환경 나노봇이에요. 플라스틱까지 분해해내죠.”
“나노라는 말도 참 많이 들었는데요.”
“분자와 원자를 다루는 공학이죠. 세상의 모든 물질은 분자와 원자로 이루어져 있죠. 그런 세계를
사람이 다룰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면 돼요. 무한한 창조가 가능하게 된 셈이죠.”
유식은 말을 이었다.
“실제 생물도 많이 쓰여요. 유전공학이나 품종개량으로 탄생한 미생물들이 있죠. 수질오염을 제거
하는 놈들은 그런 미생물들이에요.”
유식은 안경을 만지작거리다가, 작업을 멈추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주위에서 일하던 사람들도 모
두 일손을 놓고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쉬는 시간인가요?”
“아뇨, 비가 올 거라는 예보가 들어와서요.”
“일기예보를 믿나요?”
유식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다가 웃고 말았다.
“아, 예전에는 믿을 만하지 않았죠?”
“지금은 아닌가요?”
“거의 정확한 예보가 가능해요. 기차 시간처럼 정확하죠. 정부에서 기상을 조절하기도 하는 걸요.”
36 3. 세상을 되살리는 법
“정말인가요?”
“가뭄이 계속되면 구름에 제제를 뿌려 비를 오게 하죠. 홍수 피해가 심각할 것으로 예상되면 이를
조절하기도 해요. 날씨가 나쁘면 정치가를 탓한다는 옛말이 지금은 논리적인 이야기죠. 요즘은 기상
계획을 잘 세우기만 하면 웬만한 문제는 피해갈 수 있으니까요.”
“매년 홍수로 피해를 보던 시대는 지나갔군요.”
“그래요. 나도 어렸을 때 집이 물에 잠겼던 기억이 있어요. 그땐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어요.”
“뭐, 그래도 살 만했어요.”
형인은 생각했다. 나도 꽤 첨단 사회를 산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시대에서 보면 완전히 조선 시대
로군.
2008년 남자 2030년 여자 37
“국지적인 기상변화는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지만, 지구의 온도를 조절하는 작업은 국제적으로 진행
되고 있어요.”
유식이 말하는 사이에 정말로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20분 정도 지나면 멈출 거예요.”
유식은 정말로‘기차가 20분 후에 도착할 거예요’같은 투로 말했다.
“기상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으면, 운동경기나 행사 시간을 그에 맞춰 조절할 수 있겠군요.”
“첫눈이 오는 날과 시간에 맞춰 광화문에서 연인 축제가 열리죠.”
“그건 괜찮군요.”
형인은 다시 생각해보다가 물었다.
“사막에 비를 내리게 하면, 사막도 사라지겠네요. 북극의 얼음을 도로 얼릴 수도 있을 거고요.”
“음,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아요. 너무 많이 바꾸는 셈이니까. 기후도 자연스러운 흐름이 있으니
까요.”
유식은 머리를 긁적이고 말했다.
“하지만 자연 파괴로 사막화된 곳에는 나무를 심어서 재생하죠.”
“나무는 예전에도 심었잖아요.”
“보통 나무가 아니에요. 더위와 추위에 강하고, 극단적으로 수분이 적은 환경에서도 살 수 있는 식
물을 심죠. 그들이 환경을 바꾸게 되면 그 식물들은 바뀐 환경에서는 적응하지 못하고 사라지고, 그
자리에 자연적으로 다른 식물이 자라죠.”
유식은 말을 이었다.
“지구재생계획이라고 하죠. 인간이 파괴시킨 것을 다시 살려내는 전 지구적인 계획이에요. 아직 부
족하지만, 점점 나아지고 있는 건 사실이죠.”
형인은 생각에 잠겼다.
“그 식물은 유전자 조작으로 만든 거죠?”
“그래요.”
38 3. 세상을 되살리는 법
“그럼 사람은요? 사람에게 적용되지는 않나요? 이를테면, 뱃속에서부터 똑똑한 아이를 만든다든가,
부모가 원하는 적성을 가진 아이를 만들 수 있지 않나요?”
“가능하겠지요. 그런 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불쾌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하는 사람은 없나요?”
“법으로 금지되어 있어요. 국제법으로도 그렇고요.”
“일단 생겨난 기술은 언젠가 쓰이고 만다는 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요?”
유식은 한참 생각해보다가 말을 이었다.
“기술적으로는 여전히 핵폭탄도 만들 수 있어요. 하지만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죠. 일단 생겨난
기술을 되돌릴 방법은 없어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기술의 위험을 막을 수 있는 다른 기술을 만드는
것이죠.”
“핵폭탄은 이제 안 만드나요?”
“더 이상 생산되지 않아요. 대신 모든 전자제품을 무력화시키거나, 통신과 교통을 마비시키는 무기
를 쓰죠. 그래 보았자 결국은 무기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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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제4장 B
북으로 가는 기차
북으로 가는 기차
(경제)
형인은 집을 나와 강남역 근처를 걷기 시작했다. 래미, 유식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실제 세상을 접
해보고 싶어졌기 때문이었다. 서울 한복판이었는데도 공기가 맑았다. 도로를 다니는 차량도 많지 않
았고, 차가 지나갈 때엔 먼지 냄새 대신 신선한 물 냄새가 났다. 거리에 차가 다니지 않는 이유는 아마
도 많은 사람들이 김래미처럼 네트워크를 통해 일하고 있기 때문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머리 위로 달리는 모노레일도 보였고, 사람 대신 차가 다니는 지하도로 입구도 간간이 보였다. 장난
감처럼 보이는 조그만 1인용 차도 보였다. 얼핏 보기에는 이륜차에 작은 차체를 씌운 것 같았다. 태양
열이나 페달 발전기로 가는 듯했다.
“외출복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네요.”
형인은 주머니에 넣었던 홀로폰을 꺼내어 래미와 다시 접속한 뒤에 말했다. 래미는 안경을 쓰고 외
출복을 입고 거리를 걷고 있었다. 형인은 그제야 주위 사람들이 모두 김래미와 같은 안경을 쓰고 있다
는 것을 깨달았다.
“다들 그 안경을 쓰네요. 요새 유행인가요?”
“아, 예. 다들 쓰고 다니죠.”
래미가 대답했다.
“예전에 모두들 핸드폰을 갖고 다녔던 것을 생각하면 돼요. 참, 제가 몸에 달고 있는 것들도 형인 씨
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많이 다를 거예요.”
래미는 자신의 귀걸이를 가리켰다.
“우선 이 귀걸이는 MP3플레이어죠. 집 컴퓨터에 저장된 음악을 실시간으로 다운받아 들어요. 시계
2008년 남자 2030년 여자 41
와 팔찌도 무선통신 기능이 탑재된 전자 제품이에요. 물론 집의 컴퓨터가 아니라도 어디서든 인터넷
에 접속할 수 있고요.”
“건전지 값이 많이 들겠네요.”
건전지라는 말에 래미는 웃음을 터트렸다.
“건전지라고요?”
“아, 정말 왜 그래요? 아까 유식 씨한테‘주유소’라는 말을 했을 때처럼 웃네요. 대체 왜들 그래요?”
“오랜만에 듣는 말이라서 그래요. 건전지가 사라진 지도 오래됐네요.”
“그래요? 그럼 내 CD플레이어는 이제 못 쓰겠네요. 건전지를 쓰는 건데.”
“이런 식으로 2000년대에는 어디에나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볼 수 없는 것 리스트를 늘어놓아도 좋
겠는데요. 2000년대에도 공중전화나 원고지가 사라졌었죠? 일상적으로 볼 수 있던 것이 사라졌다는
것은 그 분야에 혁명이 일어났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을 거예요.”
래미는 말을 이었다.
“웬만한 소형가전은 충전 없이 사용해요. 조금 큰 제품은 태양광로 충전하고, 작은 물건들은 내 신
발 뒤축의 발전기로 걸으면서 충전해요. 신발 뒤축 발전기만 해도 2010년에 상용화가 되었는걸요. 초
소형 연료전지도 꽤 오랫동안 유행했었는데, 지금은 대개 태양광을 쓰는 재생전지로 교체되었죠.”
형인은 어디로 갈지 생각해 보았다. 마땅히 갈 곳도 없고 해서, 무작정 버스를 타 보자고 생각했다.
버스를 타고 서울을 한 바퀴 돌다 보면 여기저기 구경할 수 있을 테니까.
형인은 지나가는 사람에게 가까운 정류장을 물었다. 하지만 또 자신이 뭔가 잘못한 모양이라고 생각
했다. 그가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길을 알려 준 뒤에도 형인을 힐끔힐끔 보면서
걸어갔다.
“저 사람은 왜 날 자꾸 보는 거죠? 내가 뭐 이상한 일이라도 했나요?”
“뭘 했는데요?”
“그냥 길을 물었을 뿐이에요.”
“지나가는 사람에게 길을 묻는 일이 흔하지 않아서예요.”
42 4. 북으로 가는 기차
“요즘에는 그러지 않나요?”
“길거리에서 안경을 쓰지 않은 사람도 오랜만에 보았을 거예요.”
래미가 대답했다.
“디지털 안경에는 LBS(Location Based Service)기능이 있거든요. 지금 내가 있는 위치의 약도에
서부터 주변의 쇼핑정보도 나오죠. 요즘에는 어디에서든 길을 잃을 일이 없어요. 해외로 가도 여행책
을 들고 갈 필요가 없어요. 안경이 길을 알려주니까요.”
정류장을 향해 걷던 형인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사람들이 괴상한 동물을 끌고 가고 있는 것이었
다! 한 아이는 날개와 뿔이 달린 하얀 유니콘을 끌고 가고 있었고, 그 옆의 사람은 새끼용으로 보이는
생물을 어깨에 얹고 걸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끌고 다니는 게 뭐죠? 유전공학으로 만든 생물인가요?”
“<수호신>일 거예요. 홀로그램 가상 애완동물이에요.”
“하지만 진짜 같은데요.”
“가까이서 보면 약간 투명해 보이죠. 어느 정도의 지능이 있어 주인과 대화도 가능해요. 저 애완동
물들은 지금도 그렇지만, 인공지능기술이 지금보다 더 좋아지면 진짜 비서나 친구의 의미로 바뀌어갈
거예요.”
“무슨 환상 세계 같네요.”
“얼마 전에는 가상 동물로만 꾸며진 동물원이 만들어졌죠. 동물애호단체에서는 이런 식으로 동물원
의 모든 동물들을 가상 동물로 바꾸는 운동을 전개해가고 있어요.”
“거리에 외국인도 많이 보여요.”
래미는 잠깐 말을 멈췄다.
“내국인이죠. 관광 온 외국인도 있겠지만, 아마 대부분은 내국인일 거예요.”
이건 또 무슨 소리람?
“2000년대만 해도, 한국 사람들은 귀화한 사람조차도 인종이 다르면 외국인이라고 부르곤 했죠. 한
국인 부모를 둔 혼혈인조차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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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미는 말을 이었다.
“2000년대에는 국제결혼이 활발히 진행되었고,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들은 지금 한국사회에
완전히 뿌리를 내리고 있어요. 다시 말해, 우리나라는 더 이상 단일민족 국가라고 부를 수 없어요.”
형인은 놀랐다.
“단일민족이라는 자부심이 사라졌다고요?”
“음, 그런 개념은 많이 사라졌어요. 우리나라에서 혼혈인이 정착하지 못했던 때를 생각해 보면 사라
져야 할 개념이기도 했어요. 나는 지금 많이 완화시켜 이야기한 거예요. 지금 단일민족 운운하는 말을
누가 한다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 취급을 받을 거예요.”
“어차피 나는 뒤떨어졌으니까요.”
44 4. 북으로 가는 기차
형인은 불만스럽게 말했다.
“국가의 개념도 많이 희미해졌어요. 언어소통에 문제도 없는 데다 어느 나라에 가든 자신의 친구들
과 소통이 가능하니까요.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국가를 넘나들며 살고 있어요. 외국인을 쓰는 데 문제
가 되는 것은 그나마 문화와 사고방식의 차이랄까. 하지만 그조차도 많이 사라져가고 있어요.”
형인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전 인류가 획일화되는 문제는요?”
“전통문화를 지키기 위한 노력도 한편에서 계속되고 있어요. 하지만 인종은 계속 섞이게 될 거예요.
그럴 수밖에 없어요. 저는 이 과정이 지구가 하나가 되기 위한 전단계라고 생각해요. 언젠가는 전 세
계가 하나의 국가처럼 되는 날도 올 거라고 생각해요.”
버스에 탄 형인은 22년 전에 쓰던 교통카드를 어디에 댈지 몰라 애를 먹었다. 사람들이 형인을 신기
한 눈으로 힐끔거렸다. 운전수는 뭐라고 하려다가 그냥 통과시켜주었다. 형인은 불편한 기분으로 자
리에 앉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지 살폈다. 사람들은 돈도 내지 않고, 아무 거리낌 없이 버스에
올라타고 있었다.
형인은 홀로폰을 켰다. 래미는 막 기차를 타려고 하고 있었다.
“요즘엔 기차나 버스가 공짜인가요?”
“그럴 리가요.”
래미가 대답했다.
“하지만 아무도 돈을 내지 않아요.”
“다들 낸 거예요. 버스에 타는 순간 그 사람의 정보가 전달되면서 요금이 청구되죠.”
“버스는 그렇다 치고, 기차는 티켓이 없으면 자기 좌석은 어떻게 알죠?”
“잠깐만요, 지금 자동안내가 들어오고 있어요.”
래미가 기차에 올라타자, 귀에서“어서 오세요, 본 기차를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부터 안내
방송을 시작하겠습니다.”라는 개인방송이 들려왔다.“ 고객님의 자리는 지금 서 계신 곳에서 우회전하
셔서 세 번째 칸입니다. 자리에 도착하시면 다시 알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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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미는 그대로 걸어갔다. 좌석에 도착하자, 귀에서는“34A 좌석입니다. 편안한 시간 되십시오. 내
리실 때가 되면 미리 알려드리겠습니다.”라는 방송이 들려 왔다.
래미는 자리에 앉았다. 고속철도는 한 시간 안에 비무장지대에 도착할 것이다. 래미의 디스플레이에
는‘기차’메뉴가 새로 나타나 있었고, 래미는 그 메뉴 중에서 지도를 열어,‘ 중간에 알려주기를 바라
는 곳’에 비무장지대 고가철도 입구를 선택했다. 이곳을 지날 때 형인 씨에게 보여주어야 할 테니까.
“지금은 어떤 시설이든 그 사람에게 불필요한 안내방송으로 귀찮게 하지 않아요. 개인적으로 전해
주죠. 조용하고 편하게 갈 수 있어요. 예전에는 정류장마다 안내방송이 귀찮게 하곤 했었죠?”
“디지털 안경이 없는 사람은요?”
“역에서 기계를 빌려 주죠.”
46 4. 북으로 가는 기차
“내가 타고 있는 이 버스도 안내방송이 없나요?”
“그래요. 집에서 안경을 쓰고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요.”
“난 그냥 옛날처럼, 아무것도 달지 않고 다니고 싶어요.”
래미는 형인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 설명했다.
“기차에서 제공하는 여행 안내방송도 들을 수 있죠. 지금 창에 비치는 풍경에 관한 설명이 기차에
타고 있는 내내 흘러나와요. 지역소개에서부터 역사적인 일화도 알려 줘요. 기차만 타도 패키지여행
을 하는 것 같죠.”
래미는 디지털 안경의 메뉴를 열어, 기차 쇼핑센터로 들어갔다. 그녀는 캔커피을 하나 선택했고, 잠
시 기다리자 옆 벽면에서 달그락 소리가 나며 캔이 떨어졌다.
“자동판매기인가요?”
“지금은 웬만한 매장이 자동판매기라고 해야겠지요. 제가 RFID에 대해서는 이야기했던가요?”
“네, 모든 물품에 붙어있는 태그라고 했죠.”
“인간이 생산한 모든 물건의 위치와 이동경로가 파악되죠. 가게에서도 마찬가지죠. 물건을 바구니
에 담고 가게를 나서는 순간에 결제가 이루어져요. 따로 계산할 필요가 없죠.”
형인은 생각에 잠겼다.
“모든 물건의 위치와 이동경로가 파악된다고 했죠.”
“그래요.”
“내가 지금 버스를 타고 가는 것도 누군가가 알고 있을까요?”
“알려고만 한다면 가능해요. 그래도 길을 잃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길을 잃는 게 나아요. 난 아무에게도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리고 싶지 않아요.”
래미는 조금 신경질을 내었다.
“대체 왜 그렇게 혼자 있고 싶어 하죠?”
“당신들이 이상한 거라고요.”
“이봐요. 우리 아이들에게도 태그가 붙어 있어요. 난 지금도 아이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어요.
2008년 남자 2030년 여자 47
첫째가 소풍 갔다가 길을 잃은 적이 있어요. 다리를 다쳐서 움직일 수가 없었는데, 더 늦게 찾아냈으
면 위험했을 거예요. 태그 덕분에 우리 애는 무사했었다고요.”
“나쁜 점은 없나요? 부모님이 아이들이 어딜 가는지 실시간으로 감시하고, 친구 집에 가거나 어디에
놀러가는 것까지 통제한다면요?”
래미는 마음을 좀 진정시켰다.
“프라이버시의 문제는 UC사회가 된 현대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이죠. 우리에게 가장 많이 상담이
들어오는 분야기도 해요. 하지만 그건 핸드폰이 생겨나면서부터 있었던 문제고, 프라이버시를 잃은
대신 얻은 좋은 점이 그만큼 많아요.”
“사람이 하던 일을 기계가 전부 대체하면, 사람은 무슨 일을 하죠? 일자리가 줄어드는 문제는요?”
래미는 생각에 잠겼다.
“분명히 그건 문제예요. 하지만 기술이 발달하면서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필요하기도 해요.”
“교육을 받은 사람을 위한 기회가 많다는 것은 알겠어요.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요? 현대에는
단순노무직이라는 건 거의 존재하지 않겠군요. 하지만 그런 일밖에 할 수 없는 사람은 어떻게 되죠?
살기가 편해졌다지만, 사실 그런 기회를 제공받지 못한 사람은 더욱 더 소외되는 게 아닌가요?”
“부정하지는 않겠어요.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위한 복지제도도…….”
형인은 더 듣지 않고 버스 창가에서 바깥을 바라보았다. 래미는 조금 기분이 나빠져서 팔짱을 끼고
잠을 청했다.
“요청하신 곳입니다.”
개인 안내방송이 흘러나왔고, 래미는 잠에서 깨었다. 형인은 아직도 버스에 앉아 바깥을 보고 있었
다. 래미는 그를 불렀다.
“비무장지대에 왔어요. 바깥을 볼게요. 같이 볼 수 있을 거예요.”
래미는 창 밖을 내다보았다. 한반도 중앙을 가르는 숲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언제 보아도 아름다
운 풍경이었다.
“어때요?”
48 4. 북으로 가는 기차
“아름답군요. 하지만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아 아름다운 거죠.”
형인은 말을 이었다.
“생각해 봤는데, 이 모든 것을 이용할 수 없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아무리 네트워크로 전 세계가
이어져 있다고 하지만, 인터넷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은 오히려 있던 권리마저 박탈당하는 것이 아닌
가요? 지식 기반 경제라는 것은 결국 똑똑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차별을 유발하는 것이
아닌가요?”
래미는 그만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거 알아요? 당신은 보수적인데다가 생각하는 건 늙은이 같아요. 완전히 옛날 사람이라고요!”
그때 어디선가 폭발 소리가 들려왔다.
2008년 남자 2030년 여자 49
B제5장 B
장애가 장애가 아닌 사회
장애가 장애가 아닌 사회
(기술)
형인이 눈을 떴을 때엔 주위가 온통 연기로 자욱했고, 어두워서 앞을 잘 볼 수가 없었다. 사방에서
사람들의 신음소리가 들려왔고, 서로 이름을 부르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이어졌다.
“형인 씨? 형인 씨? 대답 좀 해요. 무슨 일이죠?”
김래미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다리가 어딘가에 끼인 것 같았다. 형인
은 그녀에게 뭔가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기운도 없었다. 맙소사, 이렇게 죽게 되는군. 22년이나 버
텨 왔는데 결국 2030년에서 죽는 거야. 왜 죽는지 알지도 못하고 말이지. 그는 그대로 까무룩 기절
해 버렸다.
형인이 다시 눈을 떴을 때엔 주위가 조금 환해져 있었다. 멍하니 고개를 들어보니, 뭔가 거대한 것을
들고 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신유식이 그의 무게의 몇 배는 되어 보이는 콘크리트
조각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맙소사, 이 사람이 이렇게 엄청난 사람인 줄 알았으면 좀 더 예의 바르게
대하는 건데.
“안녕하세요?”
신유식은 넉살 좋게도 인사했다.
“안녕하게 보여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예요?”
“버스가 건물을 들이받았어요.”
그는 콘크리트를 스펀지처럼 치우며 말했다.
“건물이 그 충격으로 무너졌고요. 지금 원인을 조사하고 있어요. 우리 쪽까지 지원요청이 들어와서
한달음에 날아왔어요. 지금 선생님을 꺼내 줄게요.”
2008년 남자 2030년 여자 51
그는 콘크리트를 조각조각 잘라내서 걷어내고, 형인의 다리를 짓누르고 있는 휘어진 의자를 손으로
우두둑 뜯어내었다. 형인은 다리가 아픈 것도 잊고 멍하니 그를 보았다.
“요즘 사람들이 원래 다 그렇게 힘이 좋은 건가요, 아니면 뭔가 유전자 조작을 한 건가요?”
“예?”
신유식은 바쁜데 무슨 헛소리냐는 얼굴로 그를 보다가, ‘아하.’하면서 별것 아니라는 식으로 대답
했다.
“구조를 하면서 기계설명까지 해 드려야 할 분이네요. 나는 지금 웨어러블 로봇을 입고 있어요. 원
래는 신체불구자를 위한 옷이지만 보통 사람이 입으면 내 힘의 몇 배를 내도록 도와주죠. 손가락 하나
하나까지 섬세하게 움직여요.”
과연 그랬다. 신유식이 자신을 들어내는 모습은 꼭 고고학자들이 땅에 묻힌 귀중한 옛 화석을 발굴
하는 것처럼 섬세했다. 단순한 기계로는 나올 수 없을 법한 동작이었다. 형인은 예전 삼풍백화점 사고
를 떠올렸다. 당시에 2차 붕괴 위험 때문에 무너진 것들을 들어낼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
이런 옷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유식은 자신의 안경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안경도 원래 약한 시력과 청력을 보조하는 거죠. 훨씬 섬세한 시각과 청각을 가질 수 있어요.”
“보통 사람들도 그런 걸 하고 다니는 건가요?”
“아뇨. 장애인이 아니면 우리처럼 필요한 직업을 가진 사람만 살 수 있어요.”
“왜요?”
“음, 글쎄요. 만약 모든 사람이 초감각 지각을 갖게 되면, 장애인은 다시 상대적인 장애인이 되고 말
테니까요.”
하지만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올지도 모르지. 형인은 생각했다. 모든 사람이 초감각 지각을 갖게 되는
날도……. 그런 날이 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뼈에 금이 간 것 같군요. 아직 움직이지 말아요. 부목을 댈 테니 조금만 참아요.”
그는 형인의 다리에 부목을 대었다. 부목은 다리에 맞게 펼쳐지더니, 정확한 크기로 늘어나 단단히
52 5. 장애가 장애가 아닌 사회
다리를 감았다.
“래미 씨와 통화하고 있어서 다행이군요. 래미 씨가 신고했죠?”
신유식은 형인을 멀뚱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에, 기계를 몸에 안 차고 있는 사람은 형인 씨뿐이군요. 사람들의 옷과 몸에 붙어 있는 기기들은,
몸에 심각한 이상이 생기거나 의식을 잃게 되면 자동으로 신고하게 되어 있어요. 가족에게도 연락이
가죠.”
그는 가방에서 수혈 팩을 꺼내들었다.
“잠깐, 괜찮아요. 난 그렇게 많이 다치지 않았으니까. 좀 더 급한 사람에게 해 줘요.”
“예? 아. 인공 혈액을 본 적이 없죠? 이건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는 제품이에요. 약국에서도 살 수 있
2008년 남자 2030년 여자 53
죠. 몇 년간 장기 보관도 돼요. 파스 붙이는 것과 같으니까 부담 갖지 말아요.”
혈액을 공장에서 산다고?
“안경을 하나 줄 테니 잠깐 보고 있어요. 상황 파악이 좀 될 거예요.”
형인은 유식에게 안경을 받아 썼다. 안경은 돌, 사람, 핏자국 따위를 메뉴에 늘어놓으며“먼지양이
많습니다.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십시오.”라는 안내를 하고 있었다.
“유식 씨, 여기 환자 위험해요!‘ 그거’가져 와요!”
형인은 유식이 차에서 들고 오는 것을 보았다. 팔 비슷한 것이 달려 있는 기계였다. 유식이 의식을
잃은 사람 옆에 기계를 가져다 놓자, 기계손이 움직이면서 다친 사람의 상처를 섬세하게 꿰매기 시작
했다. 형인이 놀라 기계를 유심히 살피자, 안경에‘원격조종 의료기기’4)라는 글자가 나타났다. 아무래
도 기계를 조종하는 사람은 어디 다른 곳에 있는 모양이었다.
어디선가“이 사람 심장병이 있어요! 도와줘요!”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곳에서는“그 사람은 천
식이 있어요.”“알레르기 조심해요.”라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형인은 그중 한 명을 돌아보았다. 저 사
람은 의식을 잃은 모양인데, 어떻게 알았을까? 형인은 문득 사람의 몸에 의료정보가 담긴 칩이 있어,
의료정보가 전해진다는 래미의 말을 떠올렸다. 아하, 그래서 저렇게 알 수 있는 거구나. 주위에서는
구조대원들이 슈퍼 히어로 만화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으로 무거운 콘크리트 조각이며 큰 기계며 사
람들을 들어 나르고 있었다.
형인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병원에 누워 있었다. 옆에 김래미가 아들 하늘이와 함께 와 있었다.
형인은 그녀가 홀로그램인 줄 알고 크기를 조정하려다가 너무 확실하게 만져지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직접 왔어요.”
래미가 말했다.
“병문안을 홀로그램으로 하는 건 예의가 아닐 것 같아서요.”
“그거 다행이네요.”
54 5. 장애가 장애가 아닌 사회
4) 원격조종 의료기기: 멀리서 원격으로 조종하는 의료기계. 이 기계로 정교한 의과수술도 가능하다. 산간 오지나 다른 국가, 교통이 불편한
지역의 환자들도 이런 방식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다. 이런 사고현장에서도 급한 환자를 병원까지 실어 나르기 전에 그 자리에서 직접 치
료할 수가 있다.
형인은 잠깐 생각해보다가 인사했다.
“처음 뵙겠어요.”
래미는 웃었다.
“옛날 가치관이려니 하세요. 무슨 사고였죠, 그건? 건물이 무너진 건가요, 차가 미쳤던 건가요?”
“하루 종일 이야기해 놓고 처음 뵙겠다고요?”
“사고는 아니에요. 근 10년 이내에 생긴 건물이 붕괴한 경우는 없어요. 웬만한 건물에는 스마트 더
스트5)가 뿌려져 있고, 중요한 시설은‘지적 재료’6)로 만들어져 있으니까요.”
“그럼 뭐였죠?”
스마트 더스트며 지적 재료가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형인은 일단 질문했다.
“사이버 테러였어요. 버스의 자동장치에 혼선을 주어 건물에 돌진하게 한 거예요. 공격이 들어온 지
점은 먼 다른 나라였고요. 현대 전쟁의 모습이라고 해야겠군요.”
“그런 테러가 자주 일어나나요?”
“테러의 양상이 그런 방향으로 변하기는 했어요. 폭발물이나 무기는 정밀 스캔 기술 때문에 공항을
통과해 들어올 수가 없어요. 하지만 오히려 그 스캔 기술을 공격하는 테러가 생겨났죠. 전자체계를 해
킹으로 공격하는 거예요. 현대 사회의 가장 큰 위협이죠. 하지만, 이번 테러는…….”
래미는 조금 망설였다.
“형인 씨를 향한 거였어요.”
“나라고요?”
형인은 다리를 다친 것도 잊고 벌떡 뛰어오를 뻔 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형인 씨에 대한 정보가 외국에 잘못 알려졌어요. 22년 전에 죽은 사람을 복제해서 깨어나게 했다고요.
극단적인 복제인간 반대 단체에서 당신을 다시‘죽은 사람’으로 되돌리기 위해 테러를 했다는 거예요.”
2008년 남자 2030년 여자 55
5) 스마트 더스트 : 먼지처럼 작은 나노기계. 미래에는 이 스마트더스트가 건물에 의무적으로 뿌려져서 벽이 무너질 기미가 있다든가, 가스가
새는 등의 문제가 생기면 바로 이를 알리게 될 것이다.
6) 지적 재료 : 사람이 몸 어디에 이상이 있으면 금방 알듯이, 기계가 자신의 몸에 있는 이상을 알아내는 공법. 광섬유 센서가 일종의 신경이
되어 외벽 전체에 퍼진다. 미래의 항공기는 모두 지적 재료로 만들어질 것이다.
“그 사람들이 앞으로도 그럴 예정인가요?”
형인은 불길한 기분으로 물었다.
“아뇨, 그게 아니라는 게 밝혀졌으니까.”
“다행이네요.”
형인은 한숨을 쉬었다.
“형인 씨에 대한 정보를 잘못 전달한 것은 또 다른 해커단체의 소행이었어요. 그 단체가 테러를 유도
한 거예요. 현대 사회에서는 정보를 바꾸는 것 자체가 무기가 돼요. 어두운 면을 보여줘서 슬프네요.”
형인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다가 뭔가가 궁금해져서 질문했다.
“복제인간이 만들어지고 있나요?”
래미는 좀 생각하는 얼굴을 했다.
“그런 소문은 많이 돌아요. 기술은 완성되어 있으니까요. 형인 씨 말마따나‘존재하는 것은 쓰이기
마련’이니까요. 물론 복제인간은 세계적으로 금지하고 있지만, 아기를 낳지 못하는 부부들이나 독신
자들이 몰래 만든다는 소문은 있어요.”
“복제인간을 금지해야 하는 이유는 뭐죠?”
래미는 생각에 잠겼다.
“생물이 남자와 여자로 나뉘어 유전자를 교환하며 다양한 유전형태를 실험하는 이유는 유전적 다양
성이 필요하기 때문이에요. 같은 유전자를 갖게 되면 질병에도 똑같이 취약하죠. ……가장 큰 문제는
복제인간에 대한 인식이에요. 복제인간이 인간인가 아닌가 하는 어리석은 논쟁이 사라지지 않고, 또
그 어떤 인간도 복제인간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는 한 복제인간은 계속 금지될 거예요.”
형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다리 안에서 뭔가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은데, 착각이겠죠?”
“착각은 아닐 걸요.”
래미는 형인에게 음료수를 권하며 말했다.
“지금 그 안에서는 나노기계가 돌아다니고 있을 테니까요. 정확한 지점으로 이동하여 부러진 뼈를
56 5. 장애가 장애가 아닌 사회
복구하고, 피부를 복구하고, 근육을 매만지고 있을 거예요.”
“아하.”
“웬만한 치료가 나노기계로 전환되었죠. 손목에 팔찌가 채워져 있죠? 그 기계가 형인 씨의 몸 상태를
실시간으로 알려 줄 거예요. 앞으로도 그 팔찌는 계속 차는 게 좋아요. 초기 암까지 진단해주거든요.”
형인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문득 병원 침대 사이로 로봇 하나가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다. 그 옆에
는 전신마비인 듯한 환자가 누워 있었는데, 로봇이 옆에서 환자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그는 환자를
섬세한 동작으로 품에 안아 일으키더니 조심스럽게 화장실로 이동했다. 그것을 보며 형인은 감탄해
서 말했다.
“유식 씨가 웨어러블 로봇을 입고 섬세한 동작을 하는 것을 보면서 기계는 저런 동작을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네요.”
래미는 그쪽을 보더니 말했다.
“아, 그건 생각으로 움직이는 로봇이에요. 지금 그 로봇이 안고 간 사람이 조종하는 거예요.”
2008년 남자 2030년 여자 57
“예?”
“시선과 뇌에서 나오는 전기신호로 움직이는 거죠. 자신의 몸을 쓰는 것만큼 편하지는 않겠지만, 과
거의 전신마비 환자들에 비하면 사실상 정상인처럼 사는 셈이에요.”
형인은 입을 벌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장애라는 개념을 다시 생각해 봐야겠어요.”
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먼 옛날에는 눈이 나쁜 사람은 장애인이었어요. 하지만 20세기에는 그렇지
않았죠. 안경을 쓰는 정도로 해결이 되니까요. 조금 불편할 뿐 누구도 그 문제로 차별하지 않아요. 지
금은 그‘안경’같은 것이 엄청나게 많고 다양하다고 생각하면 될 거예요.”
그때 홀로그램 애완 사자를 옆에 두고 앉아 디지털 안경으로 영화를 보던 하늘이가 형인을 돌아
보았다.
“아저씨, 저도 비청인이에요.”
“비청인이 뭐지?”
하늘이가 래미를 돌아보며 도움을 청했고, 래미가 설명을 덧붙였다.
“청각장애인이라는 뜻이에요.”
“엄마, 난 장애인이 아니에요.”
하늘이가 저항했다. 래미는 얼른 말을 고쳤다.
“이분은 옛날 분이라서 그래. 비청인을 가리키는 단어가 그런 것밖에 없단다. 무슨 말이 가장 적당
할까요.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
하늘이는 입을 삐죽 내밀며 불만스러워했다.
“난 들리지 않는 것뿐이지 장애인이 아니에요. 그럼 눈이 나쁜 사람도 장애인인가요? 안경을 안 쓰
면 안 보이니까?”
“그건 다르지…….”
“뭐가 다른데요?”
58 5. 장애가 장애가 아닌 사회
형인은 난감했다. 뭐가 다른 걸까? 그런데 이 애는 대체 어디가 청각장애인이라는 거지? 말도 하는
데다 내 말을 다 알아듣잖아. 무슨 수로 알아듣는 거지?
“글쎄, 눈이 나쁘면 안경만 쓰면 되지만 귀가 안 들리면…….”
“안경만 쓰면 돼요.”
하늘이는 형인에게 자신의 안경을 씌워주었다. 형인은 하늘이의 안경을 쓰고 어리둥절해졌다. 주위
의 소리가 글자로 찍혀 나오고 있었다. 또 소리의 크기에 따라 다른 크기의 글씨로 찍혔다.
“어때요?”
하늘이가 말하자, 하늘이의 입 주위에서‘어때요’라는 글씨가 찍혀 올라갔다. 하늘이는 침대 머리를
손으로 두들겼다. 침대 주위에“쨍”하는 글씨와 함께 물방울무늬가 찍혔다.
“이거…… 재미있네. 만화책 같아요. 만화책이 이런 식으로 글씨 크기나 형태로 소리를 표현하죠.”
“만화책을 봐도 정말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지 않은가요?”
“예, 가끔 그랬죠.”
형인은 안경을 벗어 하늘이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영화 자막도 마찬가지예요. 사람의 뇌는 자막을 보면서도 그것을 소리로 착각하곤 하죠. 이 안경은
단순한 형태예요. 감각을 되살려주는 기계는 많아요. 하지만 하늘이는 가끔 첨단 기계를 떼어내고 이
렇게 고전적인 방식을 쓰곤 해요. 그 편이 조용해서 좋다는 거예요.”
“오히려 난 축복이라고 생각해요. 보통 사람들은 눈을 감을 수는 있어도 귀를 닫을 수는 없잖아요?
아무리 귀마개를 해도 소리를 차단하기는 힘들어요. 안 그래요?”
하늘이가 말했다.
“그래, 그렇지.”
형인은 얼떨결에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난 원하면 언제든지 귀를 닫을 수 있어요. 침묵의 세계를 즐길 수가 있지요. 오히려 보통 사
람들이 나보다 뒤떨어진 거예요. 귀를 닫는 기술이 없잖아요.”
형인은 하늘이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확실히 그랬다. 대화에 아무 불
2008년 남자 2030년 여자 59
편이 없다면,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이 장애인일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침대 머리를 두들겼을 때 컵 주위로 그려진 물방울 파동 같은 건 뭐죠? 물론 만화 같기는
했는데.”
“공감각자7)들의 도움으로 만든 거예요. 소리에 따라 칸딘스키의 추상화 같은 색채와 모양이 나타나
죠. 큰 디스플레이로 보면 더 실감 나요. 정말로 소리를 듣는 것 같죠.”
“다른 것도 보여줄 게요.”
하늘이는 형인에게 수화를 해 보였다. 하늘이가 손가락을 움직이자, 하늘이의 목에서‘안녕하세요’
라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내 손의 움직임을 언어로 변환하는 거예요.”
“저, 잠깐만. 네가 지금 말하는 것도……?”
“생각을 언어로 변환하는 기술이에요. 거의 사람의 음성을 그대로 구현하죠. 성대를 쓰는 법도 배웠
는데, 이쪽이 더 편해요.”
하늘이는 이 문장을 수화통역으로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끝낸 그는 자랑스럽게 허리에 손을 얹었다.
“안경과 같다는 말이 좀 이해가 가네요.”
형인이 마침내 말했다.
“얘야, 날씨가 추워진단다.”
갑자기 눈앞에 노인이 나타나 그렇게 말하는 바람에 형인은 뒤로 넘어갈 뻔했다. 래미의 시아버지였
던가, 신국한 씨가 홀로그램으로 나타나 있었다.
“아버님, 형인 씨를 소개해 드릴게요.”
신국한 씨는 형인을 돌아보며‘이놈은 뭐야.’하는 얼굴로 모자를 들어올리며 인사했다.
“참, 아버님도 보지 못하세요.”
“뭘 못한다고요?”
60 5. 장애가 장애가 아닌 사회
7) 공감각: 감각을 교차해서 경험하는 증세. 시각을 청각으로 느끼거나, 청각을 시각이나 청각으로 느낀다. 이 이야기에서는 공감각자들의 도
움을 받아서 감각이 결여된 사람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만들어졌다고 가정했다.
“내가 뭘 보지 못해?”
형인과 국한 씨가 동시에 물었다.
“기계가 없으면 말이죠.”
래미가 형인에 대해 설명하자, 국한 씨는 그제야 웃으며 설명했다.
“그래, 백내장으로 시력을 잃었지. 하지만 내 안경이 시각정보를 뇌에 직접 전해주지. 내가 본다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할 건 없어요. 안경을 벗으면 장님이니까.”
그는 말을 이었다.
“내가 입고 있는 바지도 웨어러블 로봇이지. 사실은 예전에 중풍으로 쓰러졌을 때, 다리를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오. 하지만 사실 아무 불편 없이 살고 있지. 로봇다리를 쓰는 데 익숙해졌으니까.”
국한 씨는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치매 초기였을 때, 줄기세포가 상한 뇌를 살려주었고, 기억력을 회복시켜 주었지. 모두 이런
식이야. 건강이 최고라고.”
그가 사라지고 난 뒤, 형인은 잠시 생각해 보다가 말했다.
“평균수명이 높아졌죠?”
“100살은 되죠.”
래미는 웃었다.
“실버산업은 국가적인 이슈예요. 예전에는 젊은 사람이 했던 일들을 나이 드신 분들이 하죠. 아이들
을 돌보는 일도 주로 노인 분들이 해요. 안내센터에도 주로 노인들이 계시죠. 나이 드신 분들도 평생
교육을 받고, 체력과 기억력을 기계로 보조받을 수 있어서, 사실상 젊은이나 다름없이 일하시죠.”
래미는 형인을 바라보며 질문했다.
“여전히 이 시대가 싫은가요?”
“아니요.”
형인은 대답했다.
“현대 기술이 없었다면 나는 새 인생을 얻을 수 없었겠죠. 제 2의 인생을 얻을 수 없었을 거예요. 그
2008년 남자 2030년 여자 61
리고 내 시대에 아까 같은 사고가 일어났다면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거예요. 기술은 좋은 방향으로 흘
러가고 있어요. 또 앞으로도 그럴 수 있다고 믿어요.”
“아니, 형인 씨가 제기한 고민과 의문들은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이기도 해요. 그런 고민이 없다면, 기
술의 발전은 오히려 인간에게 도움이 아니라 해가 될지도 몰라요. 그건 우리 모두가 같이 노력해야 할
일이죠.”
62 5. 장애가 장애가 아닌 사회
B제6장 B
우리는 모두 이어져 있다
우리는 모두 이어져 있다
(세계/국가)
며칠 뒤, 형인이 네트워크를 돌고 있는 동안 래미가 접속해 왔다.
“일자리를 알아보는 건 잘 되고 있나요?”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조금씩 배워가고 있어요. 내가 입사할만한 곳이 있나 하고 여러 회사를 다녀
봤어요. 그런데 뭐랄까.”
형인은 생각에 잠겨 말했다.
“이상한 점이 있나요?”
“외국인이 많아요.”
래미는‘그게 왜 이상한 일이지?’하는 얼굴을 했다.
“웬만한 회사에서는 3분의 1이 외국인이더라고요. 아, 전에 외국인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죠. 그런
데 한국에 혼혈인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거 아녜요.”
“음, 외국인이 많죠. 언어의 벽이 사라졌으니까요. 회사들은 이제 국내에서만 인재를 고르지 않아
요. 입사하는 사람도 전 세계를 상대로 회사를 선택하죠. 교육 쪽도 마찬가지예요. 이젠 영어를 몰라
도 영미권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가능해요.”
“어쨌든 영어를 배운다고 고생하던 시대는 지났네요.”
“지금은 언어적 능력보다도 더 필요한 것이 많아요. 이런 것들을 보면서 요즘 애들은 공부하지 않는
다고 화를 내는 사람들도 있지만, 우리 아이들은 오히려 우리들이 습득할 필요가 없었던 방대한 분량
의 지식을 흡수해야 해요. 더 힘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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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미는 형인에게 몇 군데의 인터넷 카페 주소를 가르쳐 주었다.
“과거에는 언어의 장벽 때문에 전 세계를 잇는 네트워크가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었죠. 하지
만 지금의 인터넷 카페는 초등학생 카페조차도 다국적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우리 아이들도 전 세계
사람들과 메신저로 대화하죠. 지구촌이라는 말이 이렇게 잘 어울리는 세상이 또 있을까 싶어요.”
형인은 생각에 잠겼다.
“언젠가는 세계 여러 나라들이 하나가 될 수도 있다고 했죠?”
“알 수 없죠. 여러 가지 모습이 나타나고 있어요. 유럽과 아시아가 연합 형태로 하나가 되어가는 반
면에, 작은 도시들이 국가로 독립하기도 해요. 에너지 문제가 해결되면서, 거대한 국가에 귀속되어야
할 필요가 점점 없어지고 있거든요. 가정이 자체발전을 하게 되면서 전기선을 설치하지 않는 것과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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슷하죠.”
래미는 말을 이었다.
“최근에는 재미있는 형태의 집단이 국가로 승격되기를 원하고 있어요. 집시들을 중심으로 한 집단
인데, 실제 세상에서는 한 점의 땅도 갖고 있지 않아요. 대신 가상현실 공간에 국가를 만들었어요. 크
기는 작지만 그 안에는 정부도 있고 경찰도, 변호사도 학교도 있죠. 이들을 국제사회가 받아들일지는
미지수지만요.”
“사실 그보다 신기했던 건요, 어느 회사나 여자가 많은 점이었어요.”
래미는 잠깐 생각해 보았다.
“많지 않을 거예요. 여전히 반이 넘지 않으니까.”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과거에 비하면 많다는 거죠. 여자들은 가정살림과 육아와 회사 일을 병행
하려면 힘들잖아요……. 아, 그렇지가 않군요.”
형인은 문득 래미가 아침식사를 준비하던 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성이 가사노동에서 해방된 거죠? 마침내 말이죠.”
“과거의 기준으로 보자면 그렇지만, 충분하진 않아요. 20년이 지났다고 하지만 여전히 고위관리자
는 남자들이고, 그분들이 아직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까요. 여성차별이 없어질 시기는 제 세대가
지나서, 고위관리자들의 절반이 여성이 될 때일 거예요.”
래미는 말을 이었다.
“언젠가는 지금 나눈 대화도 이상하게 여겨지는 시대가 올 거예요. 사실 여자가 경제에 뛰어들게 된
건 실리적인 이유에서죠. 지식기반 경제에서는 실업률이 높아도 늘 회사는 고급인력 부족에 시달려
요. 2000년대에도 그랬을 거예요. 그 고급인력은 국민의 절반, 그러니까 남자 중에서 고르기에는 한
계에 이르렀던 거죠. 고급인력은 사실 남자와 여자에게 고르게 분포되어 있는데, 여성 쪽 고급인력은
집에서 잠자고 있었으니까요.”
래미는 담담하게 말했다.
“이런 면에서는 여성이 장애인보다 오히려 힘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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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요?”
“이제 장애인은 겉으로 봐서는 장애인이라는 것이 별로 눈에 띄지 않거든요. 요즘 의수와 의족은 실
제 사람의 몸과 구분이 가지 않아요. 정형수술의 발달로 외모에서 드러나는 장애도 많이 개선되었고
요. 오랫동안 같이 생활하다가 몇 년이 지난 뒤에야 상대가 장애인인 것을 깨닫고 놀라는 경우는 흔해
요. 하지만 여자는 보는 순간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으니까요. 인종차별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 이유
와 같아요.”
래미는 어깨를 들썩였다.
“전국에 지점을 둔 한 신생 회사는 재미있는 기업실험을 하고 있어요. 그 회사는 대부분의 회의를 3
차원 화상채팅으로 하는데, 전 사원에게 실제 모습 대신 아바타로 들어오도록 해요. 성별과 인종과 장
애와 나이를 불문하고 모두 차별 없이 대하겠다는 취지죠.”
형인은 그가 최근 재미를 붙인 청와대 채널로 들어갔다. 청와대는 3차원 가상현실 서비스를 제공하
는데, 이 사이트에 접속하면 마치 국회의사당에 들어가는 의원이 된 기분이 들었다. 비서가 정문에서
부터 안내하며 최근 정부의 정책과 앞으로 계획하고 있는 주요 사안을 일목요연하게 브리핑해 준다.
오늘의 정책토론 주제를 소개해주기도 한다.
래미는‘인터넷 민주주의’라는 표현을 썼다.
“민주주의는 본디 아테네의 직접 민주정치를 기반으로 하고 있어요. 그것이 민주주의가 바라는 최
종적인 형태죠. 하지만 사회가 거대해지고 복잡해지면서, 전 인구가 한 곳에 모여 의견을 나눌 수 없
게 되어 대신 대의 민주주의가 발달했죠. 하지만 네트워크의 발달로 다시 가능하게 되었어요. 네트워
크를 통해서는 이론상 전 인류가 한 자리에 모일 수 있으니까요. 세계에서 인터넷 인프라가 가장 잘
구축된 곳이 한국이라서, 세계가 한국의 인터넷 민주주의를 연구하고 있어요.”
“네티즌의 의견이 전 국민의 여론을 대변하지는 않잖아요.”
“과거에는 인터넷을 쓰는 사람이 한정적이었으니까요. 정보는 많은데 쓸만한 정보가 없다는 문제
도 있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전 국민이 인터넷을 하는 데다, 정보를 분류해주는 체계가 잘 되어 있
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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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미는 말을 이었다.
“얼마 전 논란이 되었던 정책에 대해,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가상현실 토론이 벌어진 적이 있어요.
1만여 명의 시민들이 방청객으로 모여들어 대성황을 이루었어요. 토론이 끝난 뒤에도 이 시민들은 떠
나지 않고 남아 정책에 대한 열띤 설전을 벌였어요.”
“아테네 같네요, 정말로.”
형인은 중얼거렸다.
“우리는 모두 이어져 있다.”
“뭐라고 했어요?”
“그냥 생각난 말이에요. 난 지금까지 내 정보가 세상에 빠져나가고, 누군가에게 감시당하는 느낌에
불안해하기만 했는데, 생각의 전환이 필요할 것 같아요. 오히려, 과거에 우리는 지나칠 정도로 고독했
던 거죠. 지금은 방에 앉아서 전 세계 어디로든 갈 수 있어요. 방 안에서 그랜드캐니언의 노을도 볼 수
있고, 에펠탑을 올라갈 수도 있고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 옆집 사람처럼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잖아요.”
“물론 부작용도 있어요.”
“이번에는 래미 씨가 부정적이 되었네요?”
“영향을 받았나 봐요.”
래미는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고 봐요. 공간의 제약이 없어지면서, 예전에는 미사일 발사 거리 정도로 제
한되던 전장이 전 지구로 확장되었으니까요. 강대국이 우주공간에 배치한 무기가 전 세계를 언제 어
디서든 공격할 수가 있어요. 그리고 기술의 발전은 고도의 살상무기를 낳았죠.”
“그래도 핵폭탄은 사라졌잖아요.”
“하지만 더 무서운 무기가 나올 가능성도 있어요. 가정로봇이 인간을 돕게 되었지만, 전쟁터에서는
사람을 죽이는 로봇이 생겨났죠. 그들은 아무 감정도 없이 살인을 해요. 무인 비행기와 탱크는 심리적
인 죄책감을 덜어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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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미는 말을 이었다.
“의료기술의 발달도 새로운 형태의 질병을 낳았어요. 항생제에 저항력이 있는 새로운 병이 나타났
죠. 사막을 녹지화하기 위해 개발한 식물의 유전자도 잘못하면 되면 농약에도 죽지 않는 잡초가 되어
번식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기술을 되돌릴 방법은 없죠. 그러니까 더 많이 고민하고, 더 나은 기술을 만들기 위해 노력
하고, 그래서 인류를 정상적인 자연 순환계로 돌아가게 만들어야지요?”
“마지막 말은 제 남편이 했던 말이죠? 뭐, 그래요.”
“이만 나가 볼 게요.”
“주말인데, 뭘 할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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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저기 다녀 볼까 해요. 이런 시대에 여행하지 않으면 게으른 사람이겠죠. 시간이 나면 예전에는
언어 때문에 가지 못했던 곳을 돌아다녀보려고요. 그러다가 또 의문 나는 것 있으면 물어봐도 되겠죠?”
“언제 어디서든.”
형인과 접속을 끊은 래미는 문득 방에 자신이 혼자 앉아 있는 것을 느꼈다. 래미가 쓸쓸한 표정을 짓
자, 디스플레이에서는 래미의 기분을 감지하고 부드러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래미는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클릭 한 번으로도 남편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알
고 있었다. 학교에 있는 아이들이 엄마가 보고 싶으면 어디에서든 자신을 불러낼 것도 알고 있고, 그
들과 자신이 함께 있는 것도 알고 있었다. 원하기만 하면 그의 친구와 친척들이 거실에 한 자리에 모
일 것도, 세계 어떤 나라의 사람들과 만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이어져 있다.”
래미는 문득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녀의 중얼거림에 맞춰서 디스플레이에 관련 검색어가 나
타났다. 래미는 그중에서“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 미타쿠예 오야신”이라는 인디언의 인사말을
찾아내었다. 그들은 만날 때마다 그 인사를 했다고 한다. 우리도 그럴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또 그런
것을 즐길 필요도 있는 것 같다.
“얘야, 내일부턴 추워진다더라.”
시아버님이 눈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래미는 빙긋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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