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성이 집배하는 사회

현대인의 불안과 극복

때에 따라 체인지하라 2011. 11. 1. 10:41

 

현대인의 불안과 그 극복어머니 마음으로 해야 한다. 자식이 10명 있는데 닭 한 마리뿐이다.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공평하게 나눠준다. 하지만 아이 하나가 다른 애들보다 약하거나 아프면 어머니는 그 아이에게 더 신경을 쓴다. 어머니 마음으로 가난하고 소외받은 자들과 대화해야 한다."희망,자존심,일자리,민주주의

 

불안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불안이란 사람이 지구상에 태어나면서 부터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과 함께 존속하는 인류의 병()이다. 개인 간의 갈등이나 사회의 경쟁이나 국제간의 분쟁도 사실은 이 불안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리라.

만일에 인간의 불안을 극복할 수가 있다면 이야말로 이 지구상에 평화로운 세계가 이룩될 것이다.

불안이라는 것은 대체로 미래에 일어나는 불행, 손실, 질병, 불화 등에 관련되어 일어나는 것이 대부분이다.

낙천적(樂天的)인 사람은 그다지 불안, 공포에 괴로워하지 않으나, 신경질과 비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직 그 불행이나 질병이 닥쳐오기 전 부터 그것들이 닥쳐올 것을 예상하여 그것을 마음의 세계에까지 실물이 찾아온 것 이상으로 과대하게 느껴서 괴로워하는 현상이다.

 

불안과 공포가 발생하는 계기(癸期)

 

이 불안과 공포라는 병은 조그마한 마음의 간격으로부터 숨어들어온다. 가정의 마찰, 경제 상황의 변동, 침략의 소문, 누군가가 저지른 모략 중상, 새로운 경쟁자의 출현 -----이런 것이 필연적으로 자기를 불리한 경지에 빠지게 할는지 모른다는 불안 ----- 그것이 병원체의 포자(胞子)가 되어 인간 정신의 전체에 침식하는 것이다.

대체로 새로운 계획에는 반드시 불안을 수반한다. 그러므로 겁장이는 큰 사업의 계획자는 될 수 없다. 아직 보지 못한 세계는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불안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 보지 못한 세계에 행복을 그리고 천국(天國)을 그리고 극락정토(極樂淨土)를 그리는 사람만이 참으로 미래에 큰 사업을 이룩할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불안과 공포는 마음에서

 

불안을 그리고 공포를 품는 것은 주로 마음의 문제로서 사건 그 자체, 외계(外界) 그 자체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올바른 신앙심이 없으면 의심하는 마음이 불안, 공포의 원인이다. 나쁘게 보이는 것도 결국은 선()한 것의 새싹이 된다. 이 세상에 악인은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 것을 나쁘게 보는 것은, 보는 쪽의 마음이 반영되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므로 이 쪽의 마음만 일전(一轉)하면 반드시 착해지기 마련이라는 진리를 모르는 데에서 불안 공포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대로 이 세계에는 악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기만 한다면 불안과 공포는 저절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불안, 공포는 신앙의 결핍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참으로 올바른 신앙을 갖도록 한다면 불안, 공포는 자연히 해소되어 버리는 것이다.

불안 공포를 일으키지 않으려면

 

불안과 공포의 근원은 뭐니 뭐니 해도 자기가 상대(外界 境遇등의 것도 있다)보다 힘이 약해서 그것을 감당해내지 못하고 짖눌려 버릴는지도 모른다는 예상에 뿌리를 박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어떤 의미에서 열등감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속에 <무한한 힘이 내포되어 있다> 또는 <자기는 언제나 적의 두 배의 힘을 가지고 있다>라는 자신을 가질 수가 있다면 당연히 그 같은 불안과 공포는 소멸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다.

 

다행하게도 근대의 심리학은 현재의식(現在意識)의 밑바닥에는 잠재의식(潛在意識)이라는 넓은 영역의 의식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 넓은 영역의 마음속에는 무한한 힘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해 주었던 것이다.

 

이 잠재의식(潛在意識)은 과거의 어떤 작은 일이라도 기억하고 있으며, 또 경험하지 않은 일이라도 알고 있으며, 위험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해야 좋은가 하는 신통자재(神通自在)한 힘을 속으로 내포하고 있으면서도 주어진 역할을 바로 수행할 뿐으로서 그 이상 적극적으로 자진해서 작용하여 아무 일이나 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무한한 에너지이지마는 우리들 자신이 자각되는 마음으로 모형을 제공한 것과 같은 모양의 상태가 되어 모습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그 사람이 만약 현재의식에 손실의 생각을 일으켜서 그것을 잠재의식에 전하는 것이라면 그 사람의 내부에 있는 잠재적 에너지는 공포의 감정을 일으켜서 마침내 현재의식이 마음에 그린 바와 같은 손실을 현실화(現實化)하게 된다.

 

가령 어느 큰 사업을 하는 상인이 많은 상품을 창고에 넣어 두었다고 하자. 그런데 시국의 영향을 받아서 상품의 가격이 폭락하기 시작했을 때 그 상인은 놀라서 손실의 관념이 마음에 떠오른다. 그러면 그 현재의식의 손실의 관념이 내재(內在)하는 잠재의식면(潛在意識面)에 떨어져 버린다. 잠재의식은 손실의 관념을 받으면 반사적으로 공포의 관념을 불러 일으켜서 그것에 대응하기 위한 에너지를 혼란한 상태로 내부에서 폭발시킨다. 그 내부의 혼란한 폭발력으로 그 사람의 행동이 지배되기 때문에 그 사람은 당황하여 창고 속의 상품을 싼 값으로 팔아 버린다.

 

그와 같은 시국적 환경 속에 있으면서 어떤 사람은 그것을 좋은 기회로 삼아 공포상태로 던져 버려진 상품을 극히 유리한 조건으로 매점하여 거부가 되는 것이다. 공포라는 것은 잠재의식에서 발현(發現)된 에너지의 혼란된 폭발이므로 이성적인 것이 아니다. 따라서 사건에 대하여 적당한 판단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손실이나 패배나 질병을 현재의식이 그려서 잠재의식의 건반을 두드리는 한 잠재의식의 금선(琴線)은 공포의 가락을 연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포의 감정을 연주하지 않기 위해서는 현재의 의식이 손실이나 패배나 질병을 그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진리는 반드시 자유롭게 해 준다

 

불안과 공포의 감정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는 현재의식이 손실이나 패배나 질병을 마음에 그리지 않도록 마음의 왕국을 지배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것은 어떻게 해서 가능할까. 먼저 진리를 아는 일이다. 이것은 일체의 손실, 패배 질병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인 것이다. 그렇다면 진리란 무엇인가.

 

진리란 실상(實相)인 것이다. 가상(假相)에 속하는 육체의 눈으로는 보고 들을 수가 없는 것이다. 진리란 인간 각자가 절대의 권위를 가지고 자주적(自主的)이고 아무 것에도 속박되지 않는 자유인이라는 실상(實相)이다. 실상의 세계에 있어서는 이미 인간은 자유이기 때문에 가상의 세계(現象世界)에서 그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싸울 필요도 없는 것이다. 현상의 상()이 아무리 묶여 있는 것처럼 보여도 인간의 실상은 묶여 있지 않은 것이다. 그 묶여 있지 않은 상태, 해탈(解脫)의 상태를 이루게 되면 인간의 실상은 부처의 경지까지 이르게 된다.

 

현상인(現象人) 으로서의 자각(自覺)으로부터 실상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인지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이 가는 곳을 알기보다 더욱 보기 어려운 실상(實相)으로서의 인간을 알지 못하면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을 알았을 때 모든 불안과 공포가 사라지는 것이다.

 

비근한 예이지만 이런 일이 있었다. 불교의 신심(信心)이 두터운 중년 부인이 불공(佛供)을 드리고 해가 져서 집으로 돌아가다가 절의 마당에서 개구리를 한 마리 밟아 죽였다. 집으로 돌아가서도 살생을 했노라고 후회를 하고 염불(念佛)을 외우고 하였으나 워낙 마음이 착하고 어질며 신심(信心)이 두터워 아무리 잠을 이루려고 해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밟아 죽인 개구리를 날이 새면 달려가서 묻어라도 주어야겠노라고 마음먹고 새벽에 절로 찾아갔다. 어제 밤 개구리를 밟은 자리에 가보니 개구리는 없고 썩은 오이 반 토막이 짓밟혀서 오이씨가 터져 나와 있었다. 그 부인은 그제야 어둠 속에 밟은 것이 개구리가 아니라 석은 오이였음을 깨닫고 마음을 놓았던 것이다. 그 부인은 썩은 오이를 개구리로 착각했던 것이다.

 

이 이야기가 말해주는 바와 같이 실상(實相)을 깨달으면 불안과 공포가 사라지는 것이다. 인간은 모든 일에 실상을 파악하지 못한 가상(假想)에 얽매여 불안과 공포에 괴로워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