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종말

2012년 12월 21일에 지구는 종말을 맞이한답니다. 물론 논리적인 근거는 없습니다. 종말론자들에 따르면 고대 마야인들은 2012년 12월 21일에 지구가 멸망한다는 예언을 남겼다고 하지요. 마야인의 달력은 2012년 이후의 달력을 만들지 않았는데, 그게 바로 지구 종말의 근거라는건데, 글쎄요. 믿거나 말거나죠. 종말론자들에 따르면 파푸아 뉴기니의 후리족들도 2012년에 지구가 종말한다는 예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심지어 몇몇 종말론자들은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한 지구종말의 해도 1999년이 아니라 2012년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종말이 2012년 12월 21일에 올지 아닐지는 그 날이 와봐야 비로소 알 수 있는 일이겠죠. 그런데 종말의 날은 어떤 방식으로 오게 될까요. 머릿속으로 종말의 광경을 떠올리려 노력하는 순간, 우리는 자연스레 할리우드 종말론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됩니다. 종말론 영화들을 2012년 종말론자들이 주장하는 '종말의 방식'에 따라서 한번 나누어 정리해봅시다.
가장 인기있는 종말론 영화는 역시 '소행성 충돌' 영화들입니다. 특히 지금 관객들에게 잘 알려진 영화는 1999년 여름에 거의 동시에 개봉한 [딥 임팩트]와 [아마겟돈]입니다. 두 영화 모두 미확인 행성이 지구의 충돌 궤도에 들어서자 지구인들이 과학적 방법을 동원해 막으려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사실 소행성 충돌 영화는 할리우드 특수효과가 무르익기 전에도 여러번 만들어졌습니다. 특히 1951년작 [세계가 충돌할 때](When Worlds Collide)가 유명합니다. 지구가 소행성 충돌로 종말을 맞이하고 소수의 선택받은 사람들이 우주 방주를 타고 새로운 행성에 정착한다는 [세계가 충돌할 때]의 결말은 최근의 할리우드 종말론 영화들보다도 더 대담한 구석이 있지요. 비슷한 작품으로는 혜성의 지구 충돌을 다룬 숀 코네리, 나탈리 우드 주연의 1979년작 [지구의 대참사](Meteor)도 있습니다. 사실 소행성 충돌은 2012년 종말론자들이 가장 즐겨 언급하는 종말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종말론자들은 태양계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행성 X가 2012년에 지구와 충돌한다고 믿고 있거든요. 행성 X란 해왕성보다 멀리 떨어져있고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는 가상의 천체입니다. 물론 NASA는 행성 X가 2012년에 지구와 충돌할 예정이라면 이미 육안으로도 관측이 가능해야한다며 종말론자들의 주장을 일축하고 있지요.
또 하나의 인기있는 종말론 영화는 '핵전쟁' 영화들입니다. 사실 '종말론 이후'의 세계를 다루는 많은 영화들이 핵전쟁으로 인한 인류의 종말을 가정하곤 합니다. 가장 유명한 영화는 이미 고전이 되어버린 1959년작 [그 날이 오면](On The Beach)일겁니다. 이미 중국과 미국의 핵전쟁으로 북반구의 인류가 멸종해버린 미래. [그 날이 오면]은 겨우 살아남은 미국 핵잠수함 한 척이 핵전쟁에 휘말리지 않은 유일한 대륙인 호주로 떠나지만, 결국 방사능은 기류를 타고 남반구까지 다가온다는 이야깁니다. 사실 2011년 이전까지만해도 핵전쟁이나 방사능 누출의 공포를 다루는 영화들은 할리우드에서 잘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냉전이 끝난 지금은 조금 낡은 소재였기 때문이죠. 하지만 2011년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태 이후, 우리는 자연재해에 취약한 핵발전소의 공포를 다시 한번 깨달은 바 있지요. 80년대 미국에서 만들어진 [그날 이후]처럼 방사능과 핵무기에 대한 공포를 다룬 영화들이 다시 한번 늘어날지도 모르겠습니다.
핵전쟁 종말론 영화와 비슷한 종말의 광경을 보여주는 건 아마도 거대 화산의 폭발을 다룬 영화들일겁니다. 특히 후지산 분화로 지옥이 되어버린 일본을 무대로 한 모치즈키 미네타로 원작의 [드래곤 헤드]가 대표적입니다. 비록 종말에까지 이르진 못했지만 화산의 공포를 보여준 [단테스 피크]와 [볼케이노]도 참고할 만한 작품이지요. 종말론자들은 2012년에 실재로 거대 화산이 폭발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합니다. [2012]에서도 옐로우스톤 국립공원의 초대형 화산이 폭발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요, 옐로우스톤은 60만년 주기로 분화했는데 마지막 분화로부터 이미 64만년이 지났습니다. 호주의 한 과학자는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의 토바호에 있는 지구 최대의 화산이 2012년에 폭발할 지도 모른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최근에는 백두산과 후지산의 분화 가능성이 슬슬 기어나오고 있습니다. 뭔가 지각 아래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증거들은 계속해서 나오고 있는 듯 합니다. 그게 2012년이라는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말입니다.
요즘 가장 인기있는 종말론 영화는 '태양 흑점'으로 인한 종말을 이야기하는 영화들입니다. 롤랜드 에머리히의 [2012]는 태양에서 분출된 뉴트리노라는 물질이 지구 내부의 액체를 변이시켜서 엄청난 지각 이동과 그에 따른 화산 폭발, 지진과 쓰나미로 지구가 멸망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건 물리학적으로나 천문학적으로 도저히 말이 안되는 소리라고 하지요. 그보다 더 이치있게 이야기를 전개하는 종말론 영화는 태양 흑점 폭발로 인한 태양 폭풍이 지구에 종말을 불러온다는 내용의 [노잉]입니다. 태양계에서 두 번째로 큰 행성인 목성은 11년 주기로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데요, 목성이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태양은 수소폭탄 수억개가 동시에 터지는 것 만큼 엄청난 위력의 폭풍을 발생시킨답니다. NASA는 우주기상주간 회의에서 2012년에 발생할 태양 폭풍은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1859년의 폭풍에 버금가는 위력을 가질 수도 있다고 경고한 바 있어요. 물론 [노잉]에서처럼 지구를 통째로 구워버리는 일이 발생하지 않더라도, 태양 폭풍은 자구 자기장을 역전시켜 전세계의 통신수단과 전기를 완전히 차단시킬 수 있습니다. 실지로 1989년에 발생한 태양 폭풍으로 캐나다 퀘벡주의 전기가 9시간 동안 정전된 바 있어요. 더 거대한 태양 폭풍이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기만을 기도해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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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21세기를 맞이하는 지금 종말론이 다시 인기를 누리는 걸까요?
어쩌면 2012년 종말론은 지금 전지구가 품고있는 불안의 발현일지도 모릅니다. 미소 냉전이 끝나고 21세기가 찾아오자 모든 것은 희망적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세계는 오히려 더 큰 불안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었지요. 냉전 이데올로기 전쟁은 민족, 종교 전쟁으로 변하면서 오히려 더욱 통제가 힘들어졌습니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환경 재앙도 점점 가시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롤랜드 에머리히의 [투모로우]가 환경 재앙을 다룬 대표적인 종말론 영화지요. 또한 인간이 만들어낸 새로운 질병들인 광우병, 신종플루, 조류독감은 21세기에도 얼마든지 스페인 독감으로 인한 전세계적 절멸이 재연될 수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과학 다큐멘타리적인 손길로 전세계적 바이러스의 창궐을 묘사한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컨테이젼]도 종말론 영화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게다가 공산주의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영원히 승승장구할 것 같던 자본주의의 신화는 몇번의 전세계적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2012년을 맞이하는 우리는 지구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 중 하나를 통과하고 있는걸지도 모르지요. 종말론이 더없이 어울리는 시대가 온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