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의 종말, 노동의 종말
25일(현지 시각) 스위스 다보스에서 개막한 올해 다보스포럼의 최대 화두는 '자본주의의 위기와 그 해법'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를 상징하듯 포럼 첫날 가장 먼저 열린 세션 제목은 '자본주의에 대한 토론(Debate on Capitalism)'이었다. 기업인과 노조 대표 등이 패널리스트로 참석한 이 세션에서는 기업의 도덕적 해이에서부터 21세기 경제 체제에서도 변화를 거부하는 19세기형 정부 시스템, 세계화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안주하는 노동계, 중국식 국가자본주의론의 부상 등 난상 토론이 이어졌다.
가장 먼저 포문을 연 것은 샤란 버로(Burrow) 국제노동조합총연맹(ITUC) 사무총장. 그는 "은행의 대마불사와 각국 정부의 암묵적 동의로 서민만 피해를 봤다"면서 "작금의 위기는 금융 업계의 도덕 불감증에서 시작됐다"고 말했다. 그는 "각국 정부가 경기 부양책을 쓰면서 납세자들의 돈을 거둬 은행 부도를 막는 데 썼다"면서 "잘못한 사람들이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은 채 자본주의 시스템은 (고장 난) 그대로 돌아가고 있어 서민들만 피해를 보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세계 최고 부자 나라인 미국이 최저임금을 올리려 할 때 기업인들이 반대했다"면서 "기업의 소비자인 서민들에게 하루하루 버틸 수 있는 최소한의 지원을 반대하면 세계경제는 더욱더 추락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라구람 라잔(Rajan) 시카고대 교수는 현 자본주의 시스템의 한계를 지적했다. 그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문제가 생긴 것은 급격한 기술 발달과 세계화, 창의적인 기업에 대한 과도한 보상 등이 한꺼번에 어우러졌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이어 그는 "자본주의 체제의 최대 위협은 성장 정체"라면서 "한정된 일자리를 놓고 노사정(勞使政)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불만은 계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프랑스의 최대 통신 기업인 알카텔-루슨트의 벤 페르바옌(Verwaayen) 사장은 정부와 금융 시스템의 후진성 문제를 제기했다. 페르바옌 사장은 "우리는 전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면서 24시간 경제 체제에 살고 있다"면서 "그럼에도 정부 구조는 1912년에 입안된 형태로, 금융회사는 1950년대 기준으로, 기업은 2011년 기준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즉 21세기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정부의 역할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계적인 헤지펀드 회사인 칼라일그룹의 데이비드 루빈스타인(Rubenstein) 창업자 겸 회장은 "자본주의 체제는 완벽하지 않다"고 인정하면서도 "자본주의 체제보다 나은 경제 체제는 아직까지 없다"고 단언했다. 보완할 필요는 있지만 폐기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특히 자본주의 체제는 소련 붕괴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체제에 완승했다고 지적했다.
루빈스타인 회장은 "자유방임형인 서구식 자본주의가 자칫하면 강력한 국가 개입형의 중국식 국가자본주의(State Capitalism)에 밀릴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서구 정부는 거시경제 정책에 몰두하고 일자리 창출 등 미시경제 정책은 기업이 맡았지만,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가 도래하면서 강력한 정부 개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라잔 시카고대 교수는 "국가자본주의는 따라잡는 데는 능숙하지만 새로운 시스템을 창출하는 데는 형편없다"고 반박했다.
이 세션을 관람한 하버드대 케네디스쿨(행정대학원)의 데이비드 엘우드(Elwood) 학장은 "자본주의의 위기는 3~4년 전에 이미 도래했지만, 아직 구체적인 해결책이 나오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참석자 상당수도 자본주의 시스템에 과부하가 걸렸다고 지적했다. 시민단체를 이끌고 있는 미국의 캐런 체(Tse) 변호사는 "세계화에 따른 치열한 경쟁 일변도 자본주의 시스템은 어느 사회나 낙오자 20~30%를 양산했는데, 이들을 껴안고 가지 못하는 바람에 사회 통합 체제에 문제가 생겼다"고 말했다.
이번 다보스포럼에서는 '리모델링 자본주의' '글로벌 비즈니스' '글로벌 성장' 등 자본주의 시스템에 의문을 제기하는 세션이 5~6개 있을 정도로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될 전망이다. 이 밖에도 건강보험 개혁, 중국의 부상, 지역 패권주의 등 다양한 주제로 세션이 열릴 예정이다.
한편 지난해 전 세계로 확산됐던 월가 점령 시위에 고무된 활동가들이 '다보스 점령' 운동에도 나서고 있다. 지난 16일 반(反)월가 시위대는 포럼 기간 거처로 삼을 이글루 캠프를 공개하고 다보스 점령에 들어간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에 대해 찰스 슈밥 WEF 회장은 시위대 측에 다보스포럼에 정식으로 참여해 토론을 벌이자고 제안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다보스포럼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세계경제포럼(WEF)이 1971년부터 매년 스위스의 휴양지 다보스에서 개최하는 토론회. 세계 각국 정상과 국제기구 대표 등 정치·경제 분야 거물급 인사와 유력 학자들이 모여 세계경제의 발전 방안 등을 자유롭게 논의하는 민간 회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