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스트>의 내용과 결말을 말할 참이다. 혹시라도 이 영화를 볼 분들은 여기서부터 읽지 마시길 바란다.
영화는 평화롭던 어느 마을에 안개가 몰려오면서 시작한다. 그 안개 속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끔찍하게 죽어 나온다. 안개 뒤에는 거대한 괴물이 있다. 괴물은 사람을 먹고 계속 번식한다. 사람들은 이 괴물을 물리칠 방법을 찾지 못한다. 인류는 멸망해간다. 주인공은 가족을 데리고 어디로 갈지도 모른 채 도망친다. 희망이 없다고 느낀다. 가족과 동반 자살할 생각을 한다. 아들을 죽인다. 그는 정말로 아들을 쏜다. 자신도 죽으려고 하는데, 눈앞에서 걷히는 안개. 그리고 괴물을 무찌른 군부대가 다가온다. 자, 이제 당신은 살았습니다.
이렇게 염세적인 영화를 행복한 결혼식 비디오와 바꾸다니! 이왕 이 DVD 소장했으니 여러 번 볼 수 있지만, 다시 보기는커녕 본 것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싶다. 그렇다고 시사점이 없는 영화는 아니다. 특히 결말을 보라. 굳이 결혼식 비디오와 맞바꾸지 않았어도 잊지 못할 만큼 감정이입이 된다. 1분만 더 일찍 구조대를 만났더라면 주인공의 인생이 바뀌었을 텐데.
이런 문제는 현실에서 종종 일어난다. 예를 들자면 뭐랄까, 찢어버린 로또가 당첨된 것이라고나 할까. 원서 넣길 포기했던 대학이 미달된 경우를 들 수도 있겠다. 짝사랑하던 남자가 나를 좋아했다는 걸 나중에 알아버린 경우는 어떨까. 아, 속상하다. 가끔은 연이은 불행보다 뒤늦게 찾아온 행운이 사람을 더 환장하게 만드는 법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로부터 얻은 교훈은 무엇일까. 어려운 상황이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말자? 아니면, 의사결정을 할 때는 신중하자? 아니다. 때로는 일찍 포기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아무리 신중하게 결정을 해도 틀린 경우가 있다. 다시 말하자면 미래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그게 문제다.
주인공이 안개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볼 수만 있었어도, 우리가 한 치 앞만 내다볼 수 있었어도, 운명이라는 얄궂은 것이 이렇게 장난을 치지 못했을 것이다. 운명과 대결하는 건 안개 속에서 보이지 않는 괴물과 대결하는 것과 같다. 애초부터 상대가 안되는 게임이다. 많은 사람이 2010년 마지막 날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후회로 가슴을 쥐어뜯었을 것이다. 그리고 올 초에는 어김없이 올해는 이러저러한 것들을 이루었으면 하고 바랄 것이다.
뤽 페리의 <사는 법을 배우다>라는 책에 의하면 스토아학파 철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충고했다. “조금 덜 희망하고, 조금 덜 후회하고, 조금 더 사랑하라”고. 즉 알 수 없는 미래와 바꿀 수 없는 과거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현재에 충실하라고. 나는 이 말이 불공정한 인생게임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 같다. 그리고 이건, 연초부터 을씨년스러운 영화 내용을 들어주신 분들께 드리는 내 덕담이기도 하다. 나도 이제 결혼식 비디오를 그만 잊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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