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에서 '성장'이란 단어가 실종됐다. 2008년 18대 총선까지만 해도 경제는 성장을 의미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성장'은 신자유주의 또는 극한경쟁이라는 말과 동일시되고 있다. 민주통합당 이나 통합진보당 은 물론 한나라당 에도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고 있다. 심지어 '경제'라는 말조차 '민생' '민주' '지속가능' 등과 결합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다. '성장'이 '복지'의 동반자가 아니라 '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분위기다.
동국대 박명호 교수(정치학)는 "'성장'이 경쟁을 뜻하게 되면서 정치권이 피할 수밖에 없게 됐다"며 "여기에다 고성장기가 지나고 저성장기로 접어드는 우리 경제의 현주소도 반영돼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 "'경제민주화'가 바로 성장"
지난달 중순 출범한 민주당의 강령은 '성장만을 절대 목표로 하는 성장지상주의와 토건중심 불균형성장을 배격한다'며 '소득과 분배의 형평성을 제고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당 강령에서 성장과 관련한 내용은 '중소기업과 소상공인, 자영업자에 대한 지원을 강화해 일자리를 창출하고 성장의 기반을 확충한다'는 것이 전부다.
당내 경제민주화 특별위원회가 지난 12월과 이달 초 두 차례에 걸쳐 발표한 분야별 10대 핵심 정책에도 성장 관련 정책은 거의 없다. 주로 출자총액제한제도의 부활, 순환출자 금지, 대기업의 일감 몰아주기 근절, 중소기업 단체의 하도급 분쟁조정협의권 인정 같은 대기업 정책이 대부분이다.
15일 새로 선출된 6명의 당 최고위원 중 경선기간 동안 성장관련 정책을 공약으로 제시한 후보는 한 사람도 없었다. 한명숙 대표는 "1% 초고소득자에 대한 증세와 대기업 법인세율을 인상해 복지 재정을 확충하겠다"고 했다. 민주당은 소득세 최고세율 현행 38%에서 40%로, 법인세 최고세율도 현행 22%에서 30%로 높이는 정책도 내놓았다.
당 관계자는 "흔히 청년 일자리 창출, 중소기업 지원책 등을 복지 정책으로 보는데 그렇지 않다"며 "복지가 성장의 원동력이 되는 시대로 경제 전략이 바뀌었다"고 했다.
◇한나라, 정강정책에 '복지 우선' 천명 추진
한나라당도 '교육과 복지 우선'이란 원칙을 세우고 정강정책 개정작업에 착수했다. 당 비대위 산하 정강정책개정소위는 이르면 18일, 18개 조항으로 구성된 당 강령 개정작업에 들어간다. 소위 관계자는 "당 강령 1조가 '미래지향적 선진정치'로 돼있다"며 "1조를 국민의 삶과 연관된 '교육·복지' 분야로 하기로 소위 위원들이 의견을 모았다"고 했다.
기존 강령에서 복지에 관한 강령은 7조(자생적 복지체제를 갖춘 그늘 없는 사회)에 있었고, 교육 분야는 12조(교육입국과 인재대국)에 있었다. 현재 강령은 2조(큰 시장 작은 정부의 활기찬 선진경제)부터 6조(과학기술강국과 정보복지사회)까지가 모두 경제 성장과 관련된 것들이다.
당 관계자는 "성장에 관한 내용은 대·중소기업 상생을 강조하는 표현과 함께 들어갈 것"이라며 "현 강령에 들어가 있는 '선진화'와 '포퓰리즘' 등 한나라당이 요즘 추구하고 있는 복지정책과 상충하는 측면이 있는 단어는 삭제를 검토할 계획"이라고 했다.
김종인 비대위원도 17일 "우리나라의 실정이 양극화의 갈등구조로 가다가는 언젠가 한번 폭발할 위험수위까지 도달하지 않겠나 생각이 든다"라고까지 말했다. 이날 열린 비대위 회의에선 당초 서민금융에 대해서만 논의할 예정이었지만, 분과위원들이 대학등록금, 신용카드 수수료 등의 이슈를 잇달아 꺼내면서 논의가 서민정책 전반으로 확대됐다.
당내 한 정책통 의원은 "한나라당 기조가 변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고 했다.
성장에서 복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