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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물결

카폰에서 4G까지

또 다른 신화가 시작된다 2020 IT코리아
Ⅰ. 통신서비스 부문 - 2부 - 카폰에서 4G까지
(3) 통신역사 다시 쓴 CDMA 상용화

1993년 가을. 국회에서 돌아온 윤동윤 체신부 장관은 화가 잔뜩 나 있었다. 이튿날 윤 장관은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간부회의 시간에 "오늘부터 당장 삼성전자는 체신부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라고 하세요"라고 지시했다. 이 지시는 곧바로 경비실에 전달됐다. 그 날부터 삼성전자 직원들은 체신부 현관에서 제지를 받았다. 역사상 삼성전자가 정부부처 출입을 금지당한 건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소문은 금세 퍼졌다. 기자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한 기자가 윤 장관을 찾아 자초지종을 물었다. 윤 장관은 대뜸 "모처럼 정보통신 기술 분야에서 자립을 해보겠다는데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기업이 훼방이나 놓고 다녀서야 되겠어요?"라고 되물었다.

삼성전자가 출입금지를 당한 건 윤 장관이 국회 국정감사에서 CDMA 채택을 놓고 당시 여당인 민정당 의원들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논점은 "개발이 다 된 TDMA를 놓고 왜 불확실한 CDMA 개발에 매달리느냐"는 것이었다. 윤 장관은 그 배경에는 삼성전자가 있을 것이라 짐작했다. 당시 삼성전자는 아날로그 방식인 AMPS를 독자적으로 개발하고 있었는데 퀄컴이 요구하는 기술료가 너무 비싸 CDMA 개발에 어정쩡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출입금지를 내리고 일주일이 지나도 삼성전자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보름쯤 지나가 삼성전자 강진구 회장과 김광호 사장이 장관실로 찾아왔다. 둘은 "앞으로 열심히 CDMA 사업에 참여하겠습니다"라는 약속을 하고 돌아갔다.

CDMA 기술 개발이 막바지였던 1995년 여름 어느 날.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의 양승택 소장은 정보통신부 복도에서 권혁조 신세기통신 사장을 마주쳤다. 그의 옆에는 신세기통신의 합작회사인 미국 에어터치(Air Touch)사의 이사가 서 있었다. 둘은 경상현 정보통신부 장관을 만나러 왔다고 했다. 양승택 소장은 순간 두 사람의 방문 목적을 알아챘다.

신세기통신은 1996년 4월 CDMA 방식으로 이동통신 서비스를 시작하게 예정돼 있었다. 하지만 신세기통신의 외국계 주주들은 틈만 나면 "CDMA를 못 믿겠으니 기존 아날로그 방식으로 서비스를 시작하게 해달라"고 정ㆍ관계에 로비를 하고 다녔다. 그 대표격이 신세기통신의 외국인 최대주주였던 에어터치였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를 지냈으며 에어터치의 법률고문이었던 칼라힐스는 청와대, 경제기획원 등을 돌아다니며 아날로그 방식으로 서비스를 허가해줄 것을 대놓고 요구했다.

양승택 소장은 다짜고짜 경상현 장관을 같이 만나자고 했다. 짐작했듯 경 장관과 만나는 자리에서 에어터치사의 이사는 근거도 없이 CDMA의 기술적 문제를 들고 나왔다. 양 소장은 `옳지 잘됐다' 싶어 그 자리에서 조목조목 따져 물었다. 그러자 에어터치 이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양 소장이 "이건 한국사람을 무시하는 당신의 심리적 문제지 어떻게 기술적인 문제인가"라고 말하자 그 이사는 얼굴이 빨개져서는 황급히 자리를 떴다. 그리고 1995년 10월 정통부는 `PCS 개발 방식을 CDMA 단일 표준으로 한다"고 발표했다.

1996년 1월 세계 최초로 CDMA 상용 서비스를 시작하기까지에는 이렇듯 수많은 난관을 거쳐야 했다. `한국이 독자적으로 CDMA를 만들 수 있을까'하는 미심쩍은 말을 국내외에서 수도 없이 들어야 했다. 특히, 외국 통신장비 업체들은 우리나라가 CDMA 기술로 앞서가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계속해서 CDMA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퍼트렸다.

연구개발을 맡은 ETRI와 개발에 참여했던 업체들간의 불협화음도 있었음은 물론이다. 윤 장관은 개발 전담조직인 ETRI 이외에도 서정욱 박사를 단장으로 하는 무선사업관리단을 신설했다. 이는 서로간의 경쟁심리를 자극, CDMA 개발이 속도를 내는 결과로 이어졌다. 당시 ERRI에 있는 CDMA 연구실에 `WAR ROOM'이라는 현수막이 써 있었는데 치열했던 CDMA 개발 상황을 짐작케 할 수 있는 대목이다.

우리나라는 모든 불신과 의혹을 물리치고 1996년 1월 1일 인천 및 부천지역에서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이 세계 최초로 CDMA를 상용화했다. 그리고 세 달 뒤인 4월1일 신세기통신이 CDMA 상용 서비스에 들어갔다.

CDMA 상용 서비스는 이동통신 기술 자립이라는 의미와 함께 국민경제 생활 향상과 대한민국이 정보통신기술 주도국으로 자리 매김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서정욱 한국이동통신 사장(95년 3월 선임)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CDMA 방식 이동전화 서비스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이동통신 기술과 서비스의 광복이나 마찬가지"라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국민경제 측면에서 이동전화 서비스는 국민생활 편익과 국민 소득 경제에 크게 기여했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의 `1995~1998년 통신 서비스 산업의 경제적 파급효과' 보고서에 따르면 이 기간동안 통신 서비스 산업은 실질 국민소득 증가의 7.8%와 총 산출액 증가의 12.8%를 기여한 것으로 분석됐다.

이 보고서는 또한 1990년대 중반 경쟁 체제 도입 이후 지속적인 통신망 품질 개선, 요금인하, 보급 확대 등으로 1995~1998년 기간 중 통신 서비스 산업이 소비자 편익 13조5000억원 향상에 기여했다고 분석했다.

CDMA 상용화 기술과 1990년대 중반부터 정부가 추진한 이동전화 경쟁정책은 폭발적인 가입자 증가와 더불어 대한민국을 이동전화 단말기 수출국으로 올려놓았다. 1984년 첫 개시된 우리나라 이동전화 서비스는 2004년 9월말 현재 가입자 3614만명으로 전 인구의 70%가 이용할 정도로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CDMA 기술을 바탕으로 우리나라의 이동통신 산업은 기술적인 우위와 내수시장의 확대로 본격적인 이동통신 시대를 열어나갈 수 있었다. 삼성, LG, 현대 등 CDMA 개발에 참여했던 기업들은 그 경험을 바탕으로 국내외 휴대폰 시장에서 입지를 확대했으며 CDMA 시스템 수출에서도 주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어냈다.

CDMA 개발 이전 국내 이동통신 산업은 외국산 장비를 수입해 서비스를 제공하는 수준이었다. 단말기는 모토로라에 대한 의존도가 심해 1991년에는 전체 단말기 시장의 42%, 1995년에는 52%를 의존했다. 당시 미국에서 모토로라 단말기 한 대를 사오면 비행기 값이 빠진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하지만 2001년에는 CDMA 제품의 시장 점유율은 99% 수준으로 증가했다.

국내 이동통신 단말기 제조업체들은 든든한 내수 시장을 바탕으로 세계 시장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삼성전자, LG전자가 세계 휴대폰 시장에서 수위를 달리는 것은 CDMA 기술 개발의 힘이 컸다. 우리나라 이동전화 단말기 수출액은 비약적으로 증가해 1996년 해외 시장에서 첫 진출할 때만 해도 47만 달러에 불과하던 것이 2003년에는 134억 달러에 달해 7년만에 무려 2만7000여배의 폭발적인 성장을 기록했다. 휴대폰은 단일 품목 수출로는 반도체와 자동차에 이어 세번째를 기록하면서 전략 수출 산업으로 부상했다.

이같은 단말기 수출의 호조는 우리나라가 IMF 외환위기를 조기에 극복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삼성전자의 경우 반도체 값이 하락, 고전을 할 때마다 휴대폰에서 벌어 적자분을 매꿔줌은 물론 호황기에 대비 수조원씩 투자까지 해주는 효자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오늘날 애플 아이폰을 비롯 세계 스마트폰의 주요핵심 반도체 장비가 삼성제품인 것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반도체의 소형화 첨단화의 역할을 곧 애니콜이 해온 셈이다. 콘텐츠, 솔루션 등 다양한 분야의 동반 발전과 고용 창출 면에서도 공헌하기도 했다. 2004년 7월 현재 세계 이동전화 단말기 시장에서 한국 제품은 약 26%를 차지할 정도로 성장했다.

CDMA 세계 최초 상용화는 세계 무선 통신 시장에서 우리나라가 기술 종속국에서 탈피해 기술 주도국으로 비상하는 계기가 됐다. 한국이동통신이 세계에서 처음 CDMA를 상용화할 때만해도 이동전화 가입자중 CDMA 가입자는 0.3%에 그쳤으나 2004년에는 CDMA 채택사업자가 63개국 178개 업체로 증가했다.

아울러 우리나라 CDMA 장비 산업은 세계 시장으로 더욱 활발히 진출할 수 있게 됐다. 1996년 230만 달러 규모로 출발한 CDMA 장비 수출은 2000년에는 37억달러로 성장했다. 우리나라 CDMA 이동전화 서비스 노하우를 배우려 세계 각국의 방문단이 줄을 잇기도 했다.

2002년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이 조사한 `CDMA 기술개발 및 산업성공요인과 향후과제' 보고서에 따르면 1996년부터 2001년 사이 6년동안 CDMA 기술 개발을 통한 생산유발효과는 125조2000억원, 부가가치유발효과 65조2000억원, 그리고 142만명의 고용유발효과를 실현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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