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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물결

정보혁명과 지식국가

정보혁명과 지식국가


우리가 정보혁명시대에 살고 있다는 표현은 본래의 의미를 상실할 만큼 진부해졌다. 인터넷의 발명이 불, 문자, 인쇄술에 이어 인간들을 이제까지 익숙하게 체험한 적이 없는 새로운 시대로 진입시키고 있음은 분명하다. 미래의 역사가들은 역사를 인터넷 이전과 이후로 구분하게 될 것이다.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정보혁명은 불란서혁명이나 러시아혁명처럼 눈에 띄는 정치적 사건을 수반하지 않고 조용히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조용한 혁명은 과거의 어느 혁명보다도 혁명적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전통적으로 살아 왔던 공간과 국가의 내용에 과거와는 다른 질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인류사적 변화의 폭풍을 인터넷 강국으로 분류되고 있는 한국은 과연 어떻게 맞이하고 있는가. 


내년은 윌리암 깁슨이 자신의 과학 상상소설인 뉴로맨서 (Neuromancer)에서 사이버 공간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쓴지 20년이 되는 해다. 그리고 팀 버너즈에 의해 고안된 월드와이드웹(WWW)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지 10년째 되는 해다. 정보화 시대의 상상력의 천재인 깁슨이나 버너즈 자신들도 사이버 공간이나 월드와이드웹의 오늘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보혁명의 내일 역시 우리의 상상력을 넘어 서서 달려가고 있다. TCP/IP가 전세계 컴퓨터를 네트워크로 연결하여 인터넷혁명을 가능하게 하였다면 현재 컴퓨터뿐 아니라 모든 사물에 u-chip을 내장하여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는 네트워크로 엮는 유비쿼터스혁명이 시작중에 있다. 유비쿼터스 이후에는 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현재 진행 초기 단계인 정보혁명의 암호는 네트워크와 지식이다. 정보혁명은 이미 오래전부터 개념 및 실체로서 존재해 오던 지식 및 네트워크의 전략적 가치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인터넷을 위시한 정보통신기술의 발전 및 확산은 정보와 지식의 존재형태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으로 문자, 영상, 소리 등 다양한 형태의 아나로그 정보들이 비트로 전환되어 디지털 정보화된다. 인터넷은 컴퓨터 네트워크에 접속된 다양한 주체들이 생산한 대량의 디지털 정보들을 기반으로 사이버 공간이라는 새로운 가상현실 공간을 새롭게 탄생시켰다. 이들은 사이버공간에서 자유롭게 디지털정보를 생산하고 소비하면서 사이버공간을 때로는 도서관으로, 때로는 놀이터로, 또 때로는 시장으로 활용하고 우리의 생활 전반에 깊숙이 끌어들이고 있다. 정보혁명으로 현실공간과 사이버공간을 함께 아우르는 정보공간이 급속도로 팽창하면서 우리는 컴퓨터가 있는 곳 어디에나 도서관, 학교, 은행, 증권회사, 영화관, 음악감상실 등을 통째로 들여놓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인터넷 은하수 공간 속의 수많은 디지털 정보의 별들은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지식 혁명의 길을 닦고 있다. 월드와이드웹이라는 은하수에는 현재 수십억의 별, 노드들이 링크되어 있다. 우리는 아무런 거래비용없이 클릭 한 번 만으로 이 별에서 저 별로 옮겨다니며 정보를 누리고 소비한다. 이들을 연결하고 있는 네트워크의 구조는 불가사리 모양의 중앙집중형도 아니고 거미줄 모양의 분산형도 아닌 중층의 허브형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네트워크의 중심핵에 있는 노드들은 상호간 빈번하게 접속되면서 도달 가능하지만 비교적 외곽에 위치하거나 섬으로 고립된 노드들은 일반적인 접속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현재에도 계속 디지털 정보의 별들이 생겨나고 소멸되면서 인터넷 은하계는 정지해 있는 시스템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진화하는 역동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네트워크로 연결된 디지털 정보는 접속된 컴퓨터가 있는 어디에나 전달된다. 단 이 정보를 불러낼 관심과 이유가 있는 곳에만. 정보와 지식들이 시공의 제약을 넘어 자유롭게 이동하는 한편, 특정 이슈나 분야마다 소위 매니아층이 주도하여 전문적인 정보와 지식의 교환 및 축적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정당성으로 봉해지고 권위로 포장되어 제한된 집단에 의해 생산되고 소모되던 기존의 지식생산 및 소비 체제에 도전과 변화가 일게 된다. 많은 경우 익명으로 이루어지는 인터넷상의 논의에서 누가 말하느냐 보다 무엇이 말해지는지가 중요하다. 인터넷을 통해 제공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지식이나 지혜를 정화해 내는 과정은 오히려 더 어려워지고 있다는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인터넷이 지식이나 지혜를 얻기 위한 기본 자료를 풍부하게 하는 한편 보다 활발한 검증과정을 촉진하고 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디지털 정보의 양적 증대, 자유로운 이동 및 광범위한 활용에 기반하여 사회활동 전반의 지식집약화가 촉진되고 이 과정속에서 오랫동안 폭력이나 금력의 하수인 역할을 하던 지식이 폭력이나 금력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로 때로는 이에 버금가는 권력 자원으로 부상하고 있다. 군사적으로 가공할 파괴력을 지닌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보다 우월한 정보력과 첨단 정보무기들을 확보하는 것이 전장의 승리를 위한 기본 요소가 되고 있다. 세계의 경제 성장을 이끌고 있는 소프트웨어, 디지털 컨텐츠, 제약 및 바이오 산업 등의 상품 가치는 물리적 생산 비용이 아닌 아이디어나 연구개발활동과 같은 지식노동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 인터넷이 보편화되고 사이버공간이 현실에서와는 다르게 익명적으로 그리고 다중적으로 자아를 체험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으로 부상하면서 사이버 공간 자체 혹은 여기에서 제공되는 디지털 정보는 개인이나 집단, 개인 등의 정체성이나 이념, 사회관계 형성과정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아울러 사이버공간내에서도 보다 설득력있는 그리고 보다 양질의 정보와 지식의 생산을 둘러싼 경쟁도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지식력은 한편으로는 군사력과 경제력 등 하드파워의 기반으로서, 다른 한편 정체성, 이념 등을 구성하는 소프트파워로써 그 중요성이 눈에 띄게 급부상하고 있다. 


많은 국제정치학자들이 20세기 후반이후 세계질서에서 개인, 사회집단, 부족, 초국적기업, NGO 등 국가 안과 밖의 다양한 행위자들의 부상을 주목하여 왔고 이것이 전통적인 행위주체인 국민국가의 주권 및 위상에 가지는 의미를 논의하여 왔다. 정보혁명은 테러리스트집단, 초국적 기업, NGO, 개인 등의 국제정치행위의 주요한 기반을 제공함으로써 세계질서에서 이들의 존재를 더욱 부각시켜 왔다. 수잔 스트레인지는 지식력의 부상과 국제정치 행위자의 다양화를 결합시켜 정보혁명이 가지는 국제정치적 의미를 논의함으로써 세계지식질서의 형성과 변화에 대한 연구의 지평을 연 국제정치학자 가운데 하나이다. 그녀는 국제정치경제질서를 형성하고 변화시키는 4가지 차원의 구조적 권력으로 안보, 금융, 생산, 그리고 지식을 언급한 바 있다. 그녀에 의하면 서구 중세에는 교회가 지식의 생산과 유통을 독점해 왔다. 근대 이후 민족국가는 교회를 대체하여 지식생산과 유통의 핵심이 되어왔다. 정보혁명의 발아기를 경험했던 그녀는 컴퓨터, 위성 등 정보통신혁명으로 지식축적 및 활용량의 급격한 증대와 기간 및 거리 개념의 변화를 목격하면서 지식을 국가가 독점하는 것에 대한 다양한 도전이 전개될 것임을 예견한 바 있다. 변화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초국적기업의 끊임없는 기술혁신, 과학자들의 국제적인 연대에 기반한 환경 및 대안문화운동 등이 이러한 도전의 시작임을 지적하였다.


정보화시대 세계지식질서는 어떤 모습으로 변모해 갈 것이며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지식과 네트워크가 새로운 질서를 짜는 중심축이 되고 세계지식질서가 부상하면서 정보혁명이 보다 본격적으로 진행될 21세기, 더 나아가서 22세기 역사의 주인공은 이를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자기변모에 성공하는 개인/집단/국가가 될 것임이 명백하다. 21세기 문명표준의 핵심적인 내용인 지식과 네트워크는 아날로그적으로 고정된 실체로서 존재하기 보다는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변화하는 디지털 존재들이다. 디지털 존재로서의 지식력은 단지 수능시험이나 과학올림피아드, 각종 퀴즈 시합 등의 순위로 측정될 수 없다. 기존의 지식을 단순재생산 하거나 학습하는데에서는 더 이상 많은 부가가치가 형성되지 않는다. 지식력은 현재까지 축적된 지식량뿐 아니라 지식을 생산하고 활용하는 방식과도 밀접하게 관련될 수 밖에 없다. 이런 관점에서 디지털시대의 지식력이란 것을 다양한 자원을 아웃소싱하고 서로 다른 방법과 가치관들을 조정하고 아우르면서 당면한 현실 속에서 최상의 이해나 해결책 (새로운 개념, 이론, 상품, 기업운영방식, 정책대안 등)을 찾아가는 사회적이고 제도화된 종합적인 능력으로 보아야 한다.


지식력의 구체적인 결과물인 새로운 개념, 이론, 상품, 기업운영방식, 정책대안 등의 내용과 질의 차이는 어떤 지식들이 투입 및 활용되고 어떤 제도적 틀안에서 상호작용 하였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세계지식질서가 국민국가만을 중심으로 짜여지고 있지 않는 상황에서도 우리가 대응을 모색하는데 있어서는 여전히 국가를 중심으로 이야기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국민국가가 처한 위상을 잘 드러내 보여 주고 있다. 네트워크는 국가적 차원에서 가용한 지식자원의 질을 높이고 제도나 시스템을 개선해 나가는데 있어 핵심적으로 고려해야 할 틀이다. 21세기 국가는 국가 안과 밖의 다양한 행위자들이 짜고 있는 촘촘한 네트워크를 아우르면서 국가안의 다양한 주체들에 의해 생산되는 사회지의 양과 질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이들간의 갈등과 차이를 조정해야 하며 국가 밖의 지구지를 모으고 소화해야 한다. 나아가 이 과정에서 얻어지는 지식력을 활용해 정치, 경제, 군사, 외교, 문화적 현안들을 풀어가는 ‘지식국가’로 변모되어야 한다.


지식국가의 관점에서 우리는 어디쯤 와 있는 것일까. 앞서 지식력은 한편으로는 군사력과 경제력 등 하드파워의 기반으로서, 다른 한편 정체성, 이념 등을 구성하는 소프트파워로써 볼 수 있다고 언급하였다. 한국은 현재 GDP 규모로 세계 12위, 군사비지출 규모 세계 10위의 지위에 있다. 총량적인 경제력과 군사력은 지식경제력 및 지식군사력과 차이가 있다. 우리의 경제 및 군사력 구조로 볼 때 지식경제 및 지식군사력은 전체 경제 및 군사력보다 높지 않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 국가의 지식자원의 척도로 흔히 쓰이는 연구개발비, 특허 및 국제학술지에 게재된 논문 수 등의 경우 한국은 연구개발비 지출규모 세계 8위, 미국특허 등록순위 세계 6위, 국제학술지 과학기술논문 (SCI) 게재 순위 세계 13위를 기록하고 있어 얼른 보기에 지식자원량의 측면에서 그리 나쁘지 않은 성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자원들이 경제 및 군사의 지식화를 위해 충분히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더 나아가 지식력의 핵심적인 부분을 가용 지식자원의 양보다 오히려 다양한 주체들이 가진 지식들을 모아 조정하는 과정속에서 지식에 기반하여 문제를 풀거나 새로운 가치를 형성하고 이를 통해 보편적인 지구지의 형성에 기여할 수 있는 소프트파워의 측면에서 보자면 현재 한국의 지식력에 선뜻 높은 점수를 부여하기 어렵다.

 

익숙한 세계화 구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지구지를 형성하는 중심이 아닌 변방에 위치해 있다. 지식 식민지로서의 오랜 역사에 찌들은 우리들은 오늘 부딪치고 있는 독특한 문제들을 스스로가 생산한 보편적인 지식이나 개념으로 풀어 내지 못하고 있다. 개인, 기업, 대학, 시민단체 등 개별 지식주체들은 세계지식질서 중심에서 형성된 지구지의 단순한 도입이나 소개에 급급하다. 지구지의 적절한 소화에 기반하여 이를 우리 현실에 맞게 변용시키고 보편화시킬 수 있는 성숙한 역량을 가진 지식주체들이 부족하다. 우리사회내의 지식주체들은 각자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에 기반하여 지식을 축적하고 해결책을 모색하지 못한 채, 특정한 이해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피상적인 견해들만 양산하고 있다. 현재 국가밖의 다양한 지식주체들에 의한 지식생산은 우리가 따라가지 못 할 만큼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는 부지런히 그리고 고르게 지구지를 꼼꼼히 파악하고 있지 못 하다. 결국 지구지는 우리를 한참 앞질러 나아가고 있고 사회지는 당면 문제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무식국가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기술혁신체제가 모방형에서에서 창조형으로 이행하지 못하고, 위도 핵폐기물저장소 설치 논란, NEIS 논란, 이라크파병 문제 등과 같은 현안 문제들에 대해서도 혼란만 심화되고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도 무식국가에서 지식국가로 전환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진기술의 성공적인 도입 및 소화를 넘어선 프론티어 기술 개발은 몇몇 과학자나 기업인들 중심의 단기적인 투자로 이루어질 수 없다. 과거 우리가 익숙해져온 자원동원형 개발독재방식을 넘는 기술혁신체제 전반의 효율화와 선진화가 요구되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기초연구, 고급인력, 산학연 연계 등 기술혁신체제 저변에 대한 광범위하고 장기적인 투자와 개선보다 가시적인 10대 성장동력산업을 선정하는 것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다. 


핵 폐기장설치 이슈는 우리가 당면 문제 푸는 방식을 잘 보여 준다. 문제의 다양한 해결방안들이 제기되고 최종 결정이 이루어질 때까지 지식에 기반하여 합의를 모으는 노력이나 절차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그대신, 정부주도하에 도깨비 방망이 뚝딱식으로 일방적인 해결책이 제시되었다. 그리고 나서, 당사자들은 좁은 시야의 제한된 정보에 기반한 이해타산에 따라 찬반으로 갈려 격렬한 싸움을 시작했다. 싸움과정에서 핵폐기물 처리장의 안전성과 적절한 보상이라는 본래의 의제는 슬그머니 뒷전으로 물러나고 부안군수 폭행, 청소년 등교 거부 등 주변적인 이슈들이 더욱 부각되어 버렸다. 결과적으로 문제는 해결의 방향에서 점점 멀어지게 됐다. 안면도, 굴업도, 경남 양산, 전남 영광 등을 거쳐 위도에 이르는 10 여년의 혼란속에서 우리는 문제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높이고 정확한 지식을 축적하지 못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혼란은 심화되어 문제를 풀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우리보다는 한 발 앞선 지식국가인 프랑스, 일본의 경우에는, 활발한 반핵운동의 어려움 속에서도 정부가 오랜 기간에 걸친 과학적 조사를 실시하고, 주민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구체적이고 단계적인 보상의 청사진을 제시하고 설득함으로써  난제를 성공적으로 풀어 나간 것을 주목해야 한다. 


한국이 지식국가로 성공적으로 변모하기 위해 먼저 국가 안과 밖으로 촘촘한 지식네트워크를 구성하여 지구지와 사회지의 양과 질을 높이려는 노력해야 한다. 동시에 이들을 활용하여 우리의 당면한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과 합의를 형성하기에 적합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또 하나의 숙제이다.


우리는 21세기의 기술, 20세기의 제도, 그리고 19세기 의식구조라는 서로 어긋나는 부조화속에 살고 있다. 우리의 정보통신 인프라는 지식국가 수준에 근접하고 있지만 사회 제 영역에서 제도나 의식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각종 선거에 인터넷이 활용되고 공공기관마다 온라인 집을 짓고 있지만, 우리 정치가 다양한 이해집단들의 상충되는 요구를 21세기 첨단 정보기술에 기반한 지식력으로 수렴시키는 제도와 의식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기술인프라 뿐 아니라 제도와 의식의 21세기화를 구현하는 것이 우리 지식국가건설의 핵심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