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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와 카오스의 시대

막스칼로

유럽의 대표적 역사학자 佛 막스 갈로
중세가 근대로 바뀌듯 지금은 큰 변화의 시대…
경제위기가 전부란 생각은 모래에 머리박고 보는 것

세계가 사상 초유의 금융위기 시대를 맞았다. 고통의 끝이 언제쯤인지 누구도 장담하지 못하는 '암흑기', 경제와 사회·문화·정치, 그리고 개인과 공동체의 삶이 변화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고 있다. 위기를 돌파할 영웅이 나타날 것인가? 위기 이후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유럽의 지성(知性)을 만나 '길'을 물었다.

1929년 대공황 이후 80년 만에 세계를 혼돈의 시대로 몰아넣고 있는 글로벌 금융위기. 지혜와 용기의 리더십이 절실한 위기의 시대에 우리를 구해낼 '21세기의 나폴레옹'은 과연 존재할까?

베스트셀러 역사소설 '나폴레옹'의 저자인 프랑스의 역사학자이자 소설가 막스 갈로(Gallo·77)를 지난달 27일 파리의 자택에서 만났다. 고대 로마부터 시작해 현대에 이르기까지 역사에 굵직한 자취를 남긴 위인과 영웅들을 조망해온 갈로는 위기의 시대에는 '더 멀리, 더 빨리 바라보는' 독수리의 눈을 가진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21세기는 과거처럼 영웅적인 리더십이 나타나기는 힘든 시대"라고 규정했다.

갈로의 아파트는 파리 5구 팡테옹이 바라보이는 광장에 있었다. 팡테옹은 장 자크 루소, 볼테르, 빅토르 위고, 에밀 졸라, 퀴리 부인 같은 프랑스의 위인들이 묻힌 명예의 전당이다.


▲ 유럽의 지성(知性) 막스 갈로는“역사에는 필연도, 결정론적인 것도 없다”면서“이번 위기가 언제 끝날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는 누구도 단언 못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공포를 누르고 위기에 맞서 싸우면서 연대의식과 가치를 회복하려는 인간’에 위기 극복의 기대를 걸었다. /파리=강경희 기자
초인종을 눌렀더니 193㎝ 큰 키의 노(老)신사가 문을 열었다. 현관도, 서재도, 거실도, 식당도, 복도도 온통 책장에 둘러싸인 도서관 같은 집이었다. 갈로는 그 아파트에 28년째 살면서 책을 '쏟아내고' 있다. 올해도 2부작 '프랑스대혁명'을 막 출간했다.

미국 월가에서 시작된 글로벌 금융위기의 뿌리를 묻는 질문에 갈로는 "지난해 9월 15일 리먼브러더스 사태로 가속화된 금융위기는 단지 하나의 증상에 불과하다"고 말문을 열었다.

"역사가의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는 고대 로마시대 말기 또는 중세에서 르네상스를 거쳐 근대로 이행된 시기에 비견할 만큼의 커다란 변화의 시점에 살고 있다. 단지 금융위기나 경제위기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모래에 머리를 박고 현상의 본질을 직시하지 않으려는 태도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사고방식이나 생활방식, 가치 기준을 혁명적으로 바꿀 역사의 장기적인 변화의 와중에 있다."

갈로는 "실오라기 하나로 카펫 전체 촉감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표현하면서 "금융위기도 한 시대의 장기적인 변화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증상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로마제국의 몰락, 프랑스대혁명 같은 역사적 패러다임의 변화가 올 것으로 보는가?

"그렇다. 가장 가까운 대변화를 되돌아보면 그것은 16세기 말에 시작돼 19세기에 정점을 맞은 자본주의의 역사였다. 당시 유럽 국가들이 부분적으로 세계를 지배했고 시장이 형성됐으며,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외치는 프랑스대혁명을 경험했다. 그 시대는 1·2차대전이라는 전쟁의 발발로 위기를 맞았다.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국제기구도 탄생했다. 우리는 그 체제에서 빠져나왔다. 지금의 체제는 20세기 후반에 확대됐다. 인류를 파괴할 힘을 가진 핵기술과 즉각적인 소통체계가 등장했고, 신흥 부상국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이며, 세계화로 개인들의 이동이 확대되고 개인주의가 심화돼 공동체 의식은 사라지고 있다. 인류는 고독감과 박탈감을 느끼며 불안과 절망, 분노 등이 쌓여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무너뜨릴 것이다."

그러면서 갈로는 이 시대의 키워드를 '세계화와 카오스(혼돈)'라고 요약했다.

―이번 금융위기의 진원지인 미국 월가에서는 '작은 정부가 바람직하고, 시장은 완전하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합리성과 자유 등 근대적 가치가 잘 작동하는 곳으로 생각됐다. 하지만 똑똑한 월가의 금융인들은 탐욕과 무절제의 투자로 점철됐다. 인간 이성과 시장의 실패인가?

"모두가 '작은 정부와 큰 시장'을 신봉한 건 아니었다. 자본주의는 개인주의에 기반을 둔다. 개인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며, 개인의 끊임없는 발전을 추구해왔다. 그렇다고 해도 개인의 절대적 자유만 추구한다면 혼란이 초래된다. 극단적 개인주의가 연대감과 공유감을 잃어버리면서 개인의 필요나 결정에 의해 확대돼 왔다. 그 결과 금융인들은 연대의식도, 자비심도 잃어버리고 정부는 조절능력을 상실해왔다.

이번 금융위기로 흔들리는 자동차산업을 보자. 단지 자동차산업만의 위기가 아니다. 이 세계를 구성하는 사회시스템의 위기로 해석할 수 있다. 현대인의 삶은 자동차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자동차는 일터로 나가는 데 필요한 교통 수단이지만, 환경 오염 및 에너지 문제도 얽혀 있다. 자동차를 몰고 어디든 가는 건 '개인의 자유'에 해당되지만 마구 내버려두면 교통 체증이 나타난다. 그걸 막는 규제도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국가가 과도한 신(新)자유주의, 극단적 개인주의에 대한 규제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금융위기를 면밀히 분석해 관리 감독하는 체계도 만들어야 할 것이다."

―당신의 소설 '나폴레옹'에서 나폴레옹은 '나는 행동하는 사람이다.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외쳤다. 현대에 나폴레옹 같은 영웅적 지도자가 나올 수 있다고 보나? 역사적으로 위기를 극복한 지도자의 특성이 있는가.

"역사적 변혁기에 존재한 진정한 지도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멀리 바라보고, 빠르게 판단하는', 말하자면 독수리의 눈을 가졌다. 명석함과 용기도 갖추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자질을 갖춘 지도자라 해도 현대사회에서는 모래 위에 서 있다. 예전에 왕들은 권력을 갖고 있어 불어오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결정을 내렸다. 지금은 지도자 혼자 결정 내리는 게 아니다. 여론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가령 프랑스 정부가 금융위기에 대한 대책을 내놓았다. 대책이 실행되기도 전에 비판이 높다. 사람들은 더 즉각적인 해결책을 원한다. 이런 환경에서는 한 국가를 통치하는 것 자체가 무척 어렵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등 세계 지도자들이 위기 수습에 나섰다. 위기에 강한 자질을 갖춘 지도자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현 위기를 해결할 글로벌 리더가 존재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지도자 개인의 자질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즉각성, 순간성'을 추구하는 현대의 커뮤니케이션 방식 때문이다. 리더십을 발휘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즉각적인 해결을 요구하는 현대에는 이들에게 시간을 주지 않는다. 세계를 이끄는 리더, 영웅의 출현이 지금 같은 사회체제, 민주주의체제에서는 기대하기 어렵다. 민주주의체제에서는 다음 선거까지 제한된 시간 내에 결과를 도출해야 한다. 누구든 라디오나 인터넷을 통해 의견을 개진하며 논평가 역할을 한다. 여론이 정책 결정의 방향을 주도하고, 정책 결정자가 과거 같은 권위와 영향력을 갖지 못한다."

―위기를 극복할 리더십을 기대하기 힘들다는 뜻인가.

"'지구촌'이라고 불리는 세계화시대에는 미국, 중국 등 각 국가들이 각자의 역할을 하면서 상호 간에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이상적이다. 이번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이 아시아를 첫 순방국으로 정한 것만 봐도 그렇다. 국가 간에 무력이 동원됐던 19세기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클린턴 장관은 '중국과 미국이 한 배를 탔다'며 상호 연대를 강조했다. 세계가 점점 통합되고 있어 나라 간 공조가 필요하다. 하지만 지난 세기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진 국제기구들은 허약하고 위기를 극복하는 데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위기를 벗어날 방안도 묘연한가?

"2년 전에 경제 전문가들이 쓴 글을 봐라. 누구도 오늘의 위기를 예견하지 못했다. 앞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지, 어떻게 극복할지에 대해서도 아무도 단언 못한다. 필연적인 건 없다. 역사에는 단 하나의 법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인간의 창조적 자유가 작동하는 놀라움이라는 법이다. 이 거대한 변화의 시대가 나쁜 결과로 흐르지 않게 하려면 인류를 통합시키는 문명의 가치를 상기하면서 공포를 떨치고 위기에 맞서 연대의식을 키우는 방식으로 슬기롭게 대처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왜 역사와 역사적 인물을 연구하는가?

"역사는 인간을 소유하고 활용하는 '유일한 연구실'이다. 사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알려면 의사가 부검하듯 역사를 파헤치고 들여다봐야 한다. 내가 프랑스혁명에 대한 책을 쓴 이유는 프랑스혁명을 얘기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2년 전 프랑스의 위기를 감지하고, 프랑스혁명 당시 어떻게 위기를 극복하고 사회가 변화했는지를 보여주려고 책을 썼다. 나폴레옹을 쓴 것도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가 되려면 어떤 자질이 필요한가를 알기 위해서였다."

―그동안의 역사 연구로 어떤 교훈을 얻었나?

"사회가 매우 취약하다는 다소 비관적인 관점이다. 이렇게 취약한 사회가 무너지고 야만적인 행동과 폭력이 재출현하는 데는 며칠, 아니 몇 시간도 채 안 걸릴 수 있다.

역사는 탑 속의 나선형 계단과 같은 것이다. 한층 한층 올라가다가 수평적으로 바라보면 언제나 같은 자리에 머무는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아래를 내려다보면 이미 다른 층에 서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역사는 되풀이되는 것 같지만 똑같이 되풀이되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저서를 냈다. 그 많은 사료를 어디서 찾나?

"1964년 처음 책을 낸 뒤로 45년간 100여권의 책을 썼다. 기자가 여러 곳에서 정보를 얻듯 작가도 여러 책에서 정보를 얻는다. 과거의 사실은 닳아 없어지는 게 아니다. 같은 주제를 놓고도 많은 사람들이 무한하게 다시 글을 쓸 수 있다. 모든 것은 작가의 관점에 달렸다. 21세기 역사가로서 내가 역사나 역사적 인물에 던지는 질문은 18세기나 19세기 역사가들과는 다르다. 역사는 매순간 역사가들로부터 재탄생된다."

왕성하게 글을 쓰는 비결에 대해 갈로는 "어린 시절 경험한 전쟁 때문"이라고 했다. "레지스탕스, 독일군…. 전쟁은 매일매일 다른 사건의 연속이었다. 써야만 했다. 그때 역사·정치·사회에 관심 갖게 됐다."

갈로는 한창 집필할 때는 새벽 4시에 일어나 글을 쓴다. "직업도, 취미도 글쓰기"라고 했다. 컴퓨터는 사용하지 않는다. 타자기로 글 쓰는 구세대다. 신문도 하루에 3~4개씩 본다. 하지만 인터넷이 가져온 정보혁명의 시대에 지식인의 역할이 예전같지 않다고 했다. "이 시대에 영웅적인 지도자의 출현이 어려운 것처럼 문화상품과 정보가 범람하는 세상에선 위대한 지식인의 등장도 힘들다"고 그는 말했다.




막스 갈로는 누구    '나폴레옹' 내면 그린 탁월한 傳記소설 펴내

'나폴레옹', '드골', '빅토르 위고' 등 전기(傳記)소설과 역사서 등 100여권의 저서를 낸 유럽의 대표적 지성이다.

역사소설 분야에서 그의 독특한 글쓰기는 '갈로 로망(갈로 소설)'이라고 불린다. 1997년 펴낸 4부작 대하소설 '나폴레옹'(한국에서는 5부작으로 번역)은 나폴레옹의 인간적 면모와 내면을 섬세하게 그려내 전 세계에서 쏟아지는 수만권의 나폴레옹 관련 저서 중 독보적인 것으로 손꼽힌다.

1932년 1월 7일 프랑스 니스에서 이탈리아계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 2차대전을 경험하며 역사에 눈떴다.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쳤고, 언론인과 정치인으로도 활동했다. 프랑스 시사 주간지 '렉스프레스' 논설위원, 일간지 '르 마탱 드 파리' 편집장을 지냈다. 좌파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시절 정무차관과 정부 대변인으로 일했고, 유럽의회 의원도 지냈다. 1994년 정계를 떠나 글쓰기에만 전력해 왔다. 2007년 5월 프랑스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학술기관 '아카데미프랑세즈'(프랑스 한림원)의 '불멸의 사람'이라 불리는 종신회원(40명)으로 뽑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