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아홉살때 아버지를 여의고 마을에서 �겨났다.
가난하다고 절망하지 마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고
목숨을 건 전쟁이 내 직업이었고, 내 일이었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지 말라.
그림자 말고는 친구도 없고 병사로만 10만,백성은 어린애 노인까지 합쳐 2백만도 되지 않았다.
배운게 없다고 힘이 없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으나 남의 말에 귀기울이면서 현명해지는 방법을 배웠다.
너무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말라.
나느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다.
적은 밖에 있는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
나는 내게 거추장스러운 것은 깡그리 쓸어버렸다.
나를 극복하는 그순간 나는 칭기즈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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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중에서 누가 제일 뛰어난가 하는 것을
가려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다들 처한 상황이 다르고, 모두 그 상황에서 최고의 활약을
거둔 영웅들이기 때문입니다.
업적으로만 보자면
칭기즈칸과 카이사르, 이렇게 뽑을 수 있는데
이들의 업적은 당대에 끝나버리지 않았으며
끝내 성공하는 업적을 쌓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나폴레옹와 한니발은 패망해버렸고,
알렉산더는 젊은 나이에 요절하여 제국이 사분오열되어 버렸습니다.
정복한 영토로 보자면
칭기즈칸이 최고이고 그 다음이 알렉산더입니다.
다음이 나폴레옹, 카이사르, 한니발 순서입니다.
전투력으로 보자면 당연히 나중에 활약한
나폴레옹이 최고지만, 이는 시대순서에 따르므로
객관적인 기준이 못됩니다.
전략과 전술, 정보력, 병참에서는
모두 최고수준입니다.
한니발이 정보의 중요성을 알았으며, 나폴레옹 또한
전략적인 정보수집과 적지에서의 병참보급이라는
획기적인 기법을 개발했습니다.
기록과 언변으로 보자면,
카이사르가 최고입니다.
그는 문학에도 소질이 있어 업적을 꼼꼼히 기록했으며
웅변에도 달인이었습니다.
단점으로 보자면,
징기즈칸- ?
알렉산더- 무모함.
카이사르- 개인의 안위에 무관심.
한니발- 로마의 전력을 오판.
나폴레옹- 러시아원정 대실패.
아무튼 저의 분석은 이렇습니다.
일단, 그 개인의 자질등으로 판별하기가 매우 어려운데,
결국 업적이나 결과등의 외적인 요소들로 판별한다면
칭기즈칸과 카이사르가 최고점에 가까운데
이중에서도 칭기즈칸이 업적도 크고, 후손들에 의해
끊임없이 정복이 진행되어 유라시아를 제패하다시피
한 점등으로 미루어, 칭기즈칸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유라시아의 단 하나의 칸 칭기즈 칸!
유라시아를 평정한 위대한 정복자 칭기즈칸.
징기즈칸에 대한 사료는 그의 위대한 업적과는 대조적으로
미비한 편이다. 하지만 그의 영향력은 분명 13 C 초
혼란하던 전세계 각국을 하나로 통합하기에 이르렀다.
절대 강자가 없이 흘러오던 오랜 역사가 그의 말발굽에 진로를 틀은 것이다.
모든 정복자들에게도 시련과 고난이 있었듯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아버지 또한 한 부족의 족장이었다. 그의 아버지 또한 타고난 정복
기질로 몽고 벌판을 화려하게 누비고 다니자, 타타르 족이 그를 독살 시킨다.
그로 인해 부족은 내분상태로 빠지지만 그의 강인한 근성으로 부족장의 자리
에 등극하며, 화려한 복귀를 꿈꾼다. 정복활동에 불씨를 당기게 된 것은
그의 아내를 메르키트족에게 빼앗기고 나서부터이다. 그는 기습공격에 당해서
아내를 메르키트족에게 빼앗기고 부족 또한 해체 위기에 놓이자, 그는 케레이
트족 왕칸 아래에서 힘을 키워 1년여만에 아내를 되찾고 힘을 지속적으로 키워
칭기즈칸이란 칭호를 얻기에 이르른다. (1189년)
칭기즈칸이란 명칭은 그가 믿는 광명의 신(Hajir Chingis Tengri)의 이름을
따서 만든 명칭이다.(많은 설화가 있으나 이것이 가장 유력.)
후에 그는 라이벌 쟈무카를 무찌르고 나이만족을 평정하며, 몽고제국의
통일을 이룩했다.(1204년)
그는 몽고를 통일한 뒤 몽고에서 사용한 문자가 없음을 아쉽게 여겨 당장
문자를 만들어내고, 이듬해 서하를 정벌, 그후 곧장 자신이 공물을 바치던
금나라의 수도 연경(베이징)에 입성 하는 등 몽고기병의 위력을 보여준다.
(그들의 병사 체계는 훌륭하게 짜여져서 기동력이 배가 �다고 한다.)
그는 야율초재라는 명재상을 등용하여 몽골제국이 중국을 통치하것을
한결 쉽게 해결했고, 그후 서요를 평정하고, 이슬람의 패자 호라즘 제국과
혈투를 준비한다. 일단 그는 교역단을 보냈는데, 책에는 그들이 모두 피살
되었다고 나왔으나 이는 전쟁의 명분을 만들기 위한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 침공 때도 한번 그랬었다.)
그는 호라즘과의 전투에서 연승을 거두며 호라즘 제국을 평정하고, 비단길
무역의 지배자로 군림 하게 되었다. 그는 확장을 멈추지 않고, 자신의 부하
제베와 수부타이 등을 이용하여 유럽원정 또한 지시했다.
(후에 그의 손자 바투가 이 대업을 받들어 유럽인들을 공포에 휩싸이게 한다.)
하지만, 그의 말년은 조금 불행했다고 보면 된다. 언제나 자신과 트러블을
빚어오던 아들 주치가 전투에서 죽은 것이다. 비록 자신과 의견일치가 되지
않아 고생했었지만, 그래도 자식을 잃은 슬픔은 큰터. 그때 부터 시름 시름
앓아 누웠다고 한다. 그는 자신은 말위에서 태어났으며 말위에서 죽는 다며
말을 타고 남송 원정을 시도 하는 도중 병사하고 만다.
그의 꿈대로 말위에서 나고 말위에서 죽은 정복자 다운 삶이었다.
그는 정복전쟁을 하며 만나는 상대를 존중 할 주 아는 통이 큰 인물이었다.
언젠가 호라즘 제국의 왕자 알리가 최후의 항전을 하면서 자신에게 대항하자
그는 그의 용맹함을 한참 동안 칭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전투 전략은 잔혹하게 보이기 충분했다. 그는 적을 공포심에
몰아 넣기 위하여 인두탑(해골탑)과 인질의 척추에 날카로운 쇠창을 꽂아서
조금만 움직여도 죽을 듯한 고통을 느끼게 하기도 하고 10만명의 거주하는
성을 침공하여 학식이 높은 자들 100여명만 살려주고 모두 참수하기도 하였
다.
하지만 분명 그는 위대한 정복자였다. 단지 정복 뿐 아니라 정치에도 힘을
크게 기울여서 후에 몽고제국이 크게 분열하지 않았고 자식들에게 4개로
대제국을 나누어 주어 권력다툼을 방지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역참제도와
문자를 만들어내면서 제국 통치를 용이주도하게 이끌어 나갔다.
확실한 수치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칭기즈칸이 직접 나서서 차지한
777만 평방킬로미터,
알렉산더는 348만 평방킬로미터,
히틀러는 219만 평방 킬로미터,
나폴레옹은 115만 평방 킬로미터 라고 칭기즈칸에 관한 책에서 봤다.
그는 분명 세계 어떤 정복자들 보다 많은 땅을 차지 했었고, 그의 제국은
후에 알렉산더,나폴레옹, 히틀러 처럼 쇠퇴의 길을 걸은 것이 아니라, 100년동안
이나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그는 분명 전무후무한 위대한
정복자이며 대 칸이다.
"하늘에 태양이 둘일 수 없듯이, 대지 위에 칸은 둘일 수 없다.!"
-칭기즈칸 어록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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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칸, 밀레니움 인물로 뽑혀...]
워싱톤 포스트지는 지난 1999년 연말, 21세기를 맞이하면서 지난 1,000년간 최고의 인물,최고의 책,최고의 실수 등을 발표하면서 천년의 인물중 징기스칸을 최고의 인물로 뽑으면서 그 소감을 다음과 같이 게재하였다.
"천년을 대표할 인물에는 종교개혁의 선봉가인 루터로부터 마틴 루터킹까지 역사를 장식한 많은 후보들이 있다.당신이라면 르네상스를 숭배한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뽑을 것인가.프랑스를 통일하고 민족주의의 방아쇠를 당긴 잔 다르크를 뽑을 것인가... 우리는 뉴턴과 다윈 그리고 멘델과 콜럼버스도 고려했다...
그러나 우리가 택한 천년의 인물은 그 시대의 박애자도,뛰어난 사상가도,위대한 해방가도 아니었다.
역사는 성인이나 천재,해방가들의 이야기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우리는 징기스칸을 천년의 인물로 택했다. 지나간 1,000년에서 가장 거대한 사건은 몽골이라는 한 단일 종족이 전 세계에서 자신의 의지를 완벽하게 발휘한 것이다.
징기스칸과 그 후손들은 유라시아 대륙에 광대한 자유무역지대를 만들어냈고,동서양의 문명의 연결을 강화했다. 이는 중세의 GATT체제라고 할 수 있다.그들은 인터넷이 발명되기 이미 7세기 전에 전 세계적 커뮤니케이션을 개척해 놓았다.징기스칸은 사람과 기술을 이동시켜 지구를 좁게 만든 인물이다.
그는 중세까지 존재했던 세계의 모든 것을 뒤흔든 새로운 제국을 출현시켰다.징기스칸의 제국,그들의 역사는 짧았지만 세상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기에 충분했다."
<워싱턴 포스트>
[징기스칸과 몽골제국]
징기스칸은 10만이 안되는 몽골 기마병을 이끌고 중국과 유라시아 대륙에서 동시에 전쟁을 벌여 승리하였다. 몽골군은 이동에 편한 가벼운 그물갑옷, 도망가면서도 뒤로 화살을 쏘아대는 전술등 당시로서는 가공할 만한 전투력을 갖춘 군대로서 공포를 이용한 심리전과 정보전을 자주 사용하였다.
이들은 몽골제국의 건설 자로서 인류사에 굵은 획을 그으며 하나의 정치 경제적 헤게모니 아래에 통합된 팍스-몽골리카를 구현하였다. 결국 그는 중국에서 카스피 해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역대 정복자들, 즉, 알렉산더, 히틀러, 나폴레옹이 차지한 면적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넓은 땅을 정복하여 이곳을 지나는 대상들에게 전에 없던 안전을 제공하였다.
"칭기스칸의 치세 아래 이란과 투르키스탄에 있는 모든 나라들은 어떠한 폭행도 없이 황금쟁반을 머리에 이고 해가 뜨는 땅에서 해가 지는 땅까지 여행할 수 있었다."
[징기스칸의 면모]
징기스칸은 키가 크고 몸집이 탄탄하였다. 눈은 고양이 눈이고 노년에도 흰머리가 없었으며 성욕이 대단하였다. 칭기스칸은 금나라의 수탈대상인 유목부족에서 태어나 유목사회의 생존질서에 따라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복수의 한을 풀기 위해 흩어진 부족을 하나로 끌어 모아 정착지 주변을 약탈하고 여자들을 노예로 끌고 갔다.
그는 몽골을 통일한 이후 그의 주위에 몰려든 전사들에게 나누어줄 약탈물을 얻기 위해 전쟁을 시작하였다. 몽골초원에 있던 가축의 숫자는 패권을 두고 벌어진 내전과 기후변화로 격감하였으므로 그는 이것을 채워야 했다.
당시 몽골인들은 말을 수출하고 밀가루와 무기, 직물 등을 수입했는데, 만성적인 무역역조에 시달리고 있었다. 약탈물에 대한 기대야말로 흩어지기 쉬운 집단을 묶어두고 추종자들을 확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주로 동물 뼈나 가죽으로 만들던 병기는 쇠와 구리 등 철기의 광범위한 보급으로 전쟁을 벌일 기술적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징기스칸은 말하였다.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은 적을 추격해 쓰러뜨리고 그들 소유물을 독차지하여 그 여자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그들의 말을 빼앗아 타고 다니고 그 여자들의 몸을 침대와 베개삼아 노는 것이다."
유목민의 지도자들은 어느 정도 세력이 엮어지면 바로 중국 땅에 쳐들어 감으로서 이 공백을 메우는 또 다른 유목세력이 나타나 중국지역을 선점한 기존 유목세력을 쓸어버리곤 하였지만, 이를 잘아는 칭기스칸은 탕구트와 금나라 침공에서 보듯 기선을 제압하여 적의 공격능력을 마비시킨 다음, 몽골고원으로 돌아가 초원에 남아있는 적대세력을 신속히 단속하여 힘의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하였다.
징기스칸은 샤머니즘의 신봉자였다. 그는 스스로 푸른 늑대와 흰 사슴의 후예로서 텡그리(하늘)에 의해 선택받았으며 해가 뜨는 곳에서 해가 지는 곳까지의 모든 세계를 정복하라는 임무를 받았다고 확신하였다.
"당신들이 순순히 복속하고 나오면 좋은 대우와 안식을 얻을 것이나 만약 저항한다면 영원한 하늘만이 당신들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 알 것이다." "(우리는) 투항하지 않는 사람을 잡아 눈을 멀게 하였고 손을 없앴으며 다리를 분질러 버렸다."
이런 사명감과 의지가 경제적 실익과 한 덩어리가 되면서 그의 정복욕에 거대한 추진력을 부여하였다. 젊은 시절 자신이 겪은 고난과 운명의 시련을 되돌아볼 때 유라시아의 막강한 군주가 된 것을 초월적인 힘의 덕택으로 돌린 것은 자연스럽다.
그는 언제나 자기 최면을 걸듯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 무장하고,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데 골몰하였다. 그는 평생 소치기나 마부와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음식을 먹으며, 소박한 생활을 하였고, 병사들을 형제애로서 대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주인을 배반한 자들은 적과 아군을 막론하고 죽였으며, 자신의 밑에 들어온 사람들은 끝까지 보호하였다. 그는 자신과 부하들의 모든 잠재력을 점화하고 송두리째 분출시켜 하나가 되도록 하였다. 그는 싸움터에서 능력을 발휘한 사람이면 누구든 신분에 관계없이 지휘관으로 발탁했고, 이 지휘관에게 전폭적인 신뢰와 권한을 부여했다.
칭기스칸의 유명한 장군 중에는 목수, 양치기, 대장장이, 노비가 많았고 이들은 신분상승에 대한 기대감으로 전쟁터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칭기스칸은 그들이 무조건적으로 발휘하는 충성과 능력에 대하여 승진으로써 보답하였다.
이러한 선발체제로 몽골군은 무칼리, 제베, 수베테이와 같은 엘리트 군관들을 거느리게 되었다. 칭기스칸은 다른 사람들에게 능력 밖의 일을 바라지 않았으나 몽골의 병사들은 신체적으로 그리고 군사적으로 잘 단련되었고, 집단수렵을 통해 전술을 익혔으며 고난과 고통을 견딜 줄 알았다.
또 몽골군 안에서는 평등의 원칙이 지배하였다. 모든 몽골군은 옆 사람이 하는 것과 똑같은 노력을 하였고 아무런 차이가 없었으며 재산과 권력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병사들은 상급자들과 똑같은 양의 음식을 요구할 수 있었다. 어떠한 지휘관도 사람들 앞에서 혼자 포식할 수 없었다. 양식은 똑같이 나누었다.
또 칭기스칸은 철저히 부하들과 약탈물을 분배하였으므로 부하들은 열과 성을 다해 정복전쟁에 임했다.
[몽골군의 군장]
몽골군의 군장은 대부분 이전부터 유목민들이 사용해온 것을 개량한 것이다. 이들은 가죽투구와 가공하지 않은 비단 옥이나 대충 무두질한 가죽옷을 걸치고 옻칠한 가죽 흉갑을 입었다. 장수들 역시 무거운 갑옷 대신 가벼운 비단 옷을 걸쳤다. 비단옷은 맞은 화살을 빼내는 데도 효과적이었다.
화살은 대개 반원을 그리며 날아오게 마련이다.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은 경우, 머리와 심장에 맞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 몸과 팔다리에 맞는다. 화살이 비단에 박히면 질긴 성분 때문에 잘 뚫지 못하고 뚫어도 박히는 부분에 비단이 말려 들어간다.
비단을 조심스럽게 잡아당기면 화살이 금방 빠져 나와 상처가 깊게 나지 않고 쉽게 아물었다. 무기로는 가볍고 작은 활, 찌를 수도 있고 휘두를 수도 있는 짧은 칼, 갈고리가 달린 창, 가볍고 예리한 도끼를 들었다. 몽골군은 흉노의 긴 활과 키타이의 짧은 활의 중간크기 활을 만들어 화살의 비행거리를 현격히 늘렸다.
화살촉도 개량해 끝이 뾰족한 일반 인명살상용, 화살촉에 구멍을 뚫어 날아갈 때 큰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심리전용, 비행거리가 긴 후방부대용 등 다용도 화살을 만들어 사용했다. 몽골의 군사 기술자들은 일직선이던 전투용 칼날을 휘어지게 만들었다.
날이 일직선이면 한번 공격으로 적병을 치거나 찌르는 것 중 한 가지만 가능한데, 날이 휘어 있으면 일단 치고 나서 베는 효과를 동시에 볼 수 있었다. 올가미도 한 개씩 가지고 다녔는데 적을 잡아 묶거나 말을 매두거나 무거운 장비를 끌 때 사용하였다.
이들은 모두 주머니를 차고 다녔는데 밀납과 활줄, 화살촉을 갈기 위한 줄, 실과 바늘 따위가 들어 있었다. 또 방수가죽부대에 여벌의 옷을 넣고 다니다가 강을 건널 때에는 부풀려서 배처럼 써먹었다. 말꼴을 담는 주머니와 냄비를 가지고 다니는 병사도 있었다.
식량으로는 말린 양고기와 응고한 양젖을 간편하게 달고 다녔다. 이렇듯 가짓수는 많지만 아주 가벼웠다. 그래서 양곡을 실어 나르는 번거로움이 적었다. 또 가족 그리고 가축과 함께 이동하여 보급로가 따로 필요 없었던 것이다.
말안장도 높이를 낮추어 말을 탄 병사들이 몸놀림을 자유롭게 했으며, 등자를 사용해 기마병이 말을 달리면서 일어서 몸을 뒤로 돌리고 활을 쏠 수 있게 했다. 몽골 군화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병사의 발을 보호해 주도록 발목부분에 금속판을 붙였으며 디자인도 개선시켜 신발 코를 위로 들리게 했는데, 이는 달리는 말 위에서 일어섰을 때 등자에서 발이 빠져 낙마하는 것을 막아주었다.
[전략과 전술]
몽골군의 전술은 흉노와 투르크(돌궐)가 사용하던 방법과 같다. 어린 시절부터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기마 궁수로서 그들의 화살은 200미터나 400미터 이상 멀리 있는 사람도 쏘아 맞힐 수 있었다.
사슴 무리에 몰래 접근하는 법은 적에게 들키지 않고 정찰조를 보내는 방법을 가르쳐주었으며 사냥할 때에 몰이대형으로 달아나는 야생동물들의 방향을 바꾸게 하는 법은 적군을 양익으로 포위할 수 있는 우회기동법을 가르쳐주었다.
몽골군은 침묵 속에서 기수의 신호에 따라 움직이다가 돌진의 순간 비명과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는데 이는 사냥물을 흥분시키고 갈피를 못 잡게 하는 사냥꾼방식이었다. 사냥감을 지치게 하고 갈팡질팡하다가 기진맥진하게 한 뒤, 포위하여 조직적인 살육으로 끝을 내는 거대한 몰이사냥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만일 적이 완강하게 방어하면 전열을 열어주어 적이 도망칠 수 있도록 했다가 추격하면서 가능한 많은 도주자들을 베어버렸다. 이렇게 날개모양의 전투대형으로 적을 에워싸는 방법은 오래 전부터 행해져 온 영원불변의 전술이었다.
" 낮에는 늙은 늑대의 경계심으로, 밤에는 갈가마귀의 눈으로 지켜보아라. 전투에서는 적을 매처럼 덮쳐라."
따라잡기 어려운 기동력에 자신감을 갖고 있던 몽골군은 초원의 늑대처럼 흩어져 사라졌다가 적이 경계심을 늦추면 다시 돌아와 덮쳤다. 몽골군은 마치 영양과 호랑이를 사냥하듯, 적을 사냥했던 것이다. 또 몽골은 적을 발견하자마자 한 사람이 서너 대씩 화살을 쏘아대면서 돌진한다.
적이 꺾이지 않은 것을 알아차리면 그들은 자기군사가 있는 곳으로 거짓 퇴각하여 적을 기지에서 멀리 떨어진 험한 지형의 함정으로 유인하여 전위와 양익에 배치된 몽골의 경기병들이 화살을 날려 적을 쉴새없이 공격하여 적진을 흐트러뜨린 뒤 갑작스럽게 반격을 가하였다.
적이 너무 강하다고 판단되면 그들은 하루나 이틀이 지나도록 후퇴하면서 통과하는 지역을 약탈하거나 잘 선택된 지점에 기다리고 있다가 적이 줄을 지어 지나가기 시작하면 튀어나와 기습하기도 하였다. 몽골군이 행군할 때는 아무리 작은 부대라도 항상 정찰병을 사방에 파견하여 복병을 조심하였다.
그들은 높은 곳에 올라가 약 100-200 km 정도를 정찰하였으며 토착민들을 붙잡아 전투하기에 적합한 장소 및 야영이 편리한 곳 또는 양식 등의 사정을 알아왔다. 또 지휘자의 막사는 항상 높은 곳을 잡고 그 주위에 순찰 경비병을 두었다.
어떤 막사든지 두 필의 말을 밤에도 안장을 풀어놓지 않은 채 만약의 사태를 위해 대비해 두고 그 밖의 말은 방목해 두었다. 막사는 해가 저문 후 사람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으로 이동하여 적의 야습을 막았다. 전투에 들어갈 때는 높은 곳에서 적정을 자세히 살핀 후 유리할 때는 싸우지만 불리하면 싸우지 않았다.
전진을 중지하고서 적정을 잘 정찰하여 약점이 발견되면 고작 백기로서도 1만이 넘는 적을 포위할 수 있었으며 1천기를 가지고서도 1백 리의 간격을 메꿀 수 있었다. 적의 견고한 진지를 돌파하는데 전군의 10분의 3을 선봉대로 충당하였으며 적과 부딪치면 삼삼오오로 흩어진다.
한곳에 모며 있으면 포위 당할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적이 흩어지면 이쪽도 흩어지고 반대로 한 곳에 모이면 이쪽도 모인다." 몽골의 경기병 들은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이들은 재빨리 돌아다니면서 적군의 움직임을 살피고 적군이 진지를 구축하거나 이동하는 것을 차단하며 달아나는 적을 추격하였다.
적군이 발견하고 공격하려면 재빨리 달아나고 주둔해 있던 자리에서 전열을 정비하려면 어느새 다가와 공격을 퍼부었다. 전열의 맨 앞에 선 경기병들이 적의 기동력을 잃게한 후 중무장한 기병대가 돌격하였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병력수가 많아도 이를 감당해 내지 못한다.
만약 돌격부대가 격퇴를 당하면 그 다음 부대가 계속하며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파고든다. 중기병들은 대부분 육박전을 펼쳤으므로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긴칼과 창을 꼬나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화살로 적의 인마를 주로 살상하였으며 백병전은 가능한 한 피하였다.
이러한 몽골의 경기병과 중기병은 화북을 휩쓸었고 중동과 러시아에서도 위세를 떨쳤다. 기타 몽골군 보병에 대해서 적의 기병이 쳐들어오면 후퇴해서 수비를 견고히 한 다음 반격하기도 하고, 적이 성안을 지키며 나와 싸우지 않으면 소 또는 사람이 타지 않은 말을 내보내어 적을 혼란케 하였으며, 적이 말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방책을 설치했을 때에는 기병으로 하여금 활을 쏘아가면서 그 주위를 돌게 하여 적을 피로하게 만든 후 공격을 감행하였다.
지구전도 가끔 써서 적의 식량이나 연료가 떨어져 동요하게 될 때 서서히 접근해서 싸웠다. 몽골군의 수가 적을 때에는 나무판자로 흙먼지를 일으켜 대병력인 것처럼 보이게 하며 겁을 먹게 하며 돌격하기도 하였다.
혹은 잠시 교전했다가 식량, 무기를 버려 둔 채 도주하여, 적이 이겼다 생각하고 추격해 오는 것을 이용, 복병이 일거에 역습하였다. 변화무쌍한 전술이며 자기들이 승리했을 때는 철저하게 추격을 감행 몰살하며, 패했을 때는 사방팔방으로 도망쳐 잡히지 않았다.
[정복의 길]
사냥과 목축으로 살아가던 이들이 어떻게 하여 무한한 인적 자원을 가진 아시아의 강력한 문명 국가들을 정복할 수 있었을까? 군사상으로 볼때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칭기스칸은 저항하는 자는 최후의 한 명까지 죽여 없앴다. 코라즘전에서 2만명의 몽골별동대는 코라즘샤 무하마드를 쫓아 중앙아시아와 러시아를 무대로 약1만km의 대 추격전을 전개하였다. 몽골군의 논리는 항복하면 포용, 저항하면 말살이었다.
항복하지 않고 저항을 시도했던 사마르칸드, 니샤푸르, 메르브, 우르겐치 등에서는 사상 유례없는 대학살이 벌어졌고 이러한 전법은 수많은 무혈입성을 가능하게 하였다.
둘째 그는 미리 정보를 수집하고 지리를 조사하여 면밀한 작전 예정표를 만들어 이에 따라 행동하였다.
셋째 그는 군대와 사회를 밀접하게 연결하여 동고동락하는 집단을 만들고 전우애를 바탕으로 야사라는 철의 기율을 요구함으로서 전투력이 극대화되었다.
넷째로 병사는 교대 말을 항상 3-4필 준비하였으므로 부대의 기동력이 아주 컸다.
다섯째로 그는 실용적 기술을 존중하였다. 몽골 기마군의 활은 팽팽한 활로서 화살의 속력이 빠르고 사정거리가 길어 초원에서는 효과적이었으나 정착민이 성문을 닫고 지구전을 시작하면 별 방법이 없었는데 칭기스칸은 금나라의 기술자들을 잡아 공성무기를 개발하여 포병, 공병, 기갑(기마)의 입체편성을 함으로서 중앙아시아나 중국의 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여섯째로 몽골군은 진군 중에 다른 유목민을 계속 흡수하여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에는 병력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즉, 북 중국에서는 상당한 키탄군대와 한인군대를 추가로 확보하였으며 서방원정에는 위구르와 카를룩 그리고 키탄인이 합류하였고, 한인 공성기술자와 무슬림 기술자들이 성채공격에 동원되었다.
또 항복한 적에게 군량과 병졸을 징발함으로서 수많은 전쟁에서 나라가 피폐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강해질 수 있었다. 몽골군에게 전쟁은 다른 사람들을 접수, 흡수하는 시위운동에 가까웠다.
일곱번째로 몽골의 적들은 통일된 행동습관이 적어 몽골군에게 각개격파 되었다.
[정치, 외교력]
칭기스칸은 거대한 규모로 심리전을 사용하였다. 칭기스칸은 군사적인 승리의 전제로서 적 내부의 반목을 이용하였다. 불교도인 쿠출룩을 정벌할 때, 그는 민중들이 무슬림인 점을 이용해 이슬람을 옹호함으로서 해방군으로 행세하였다.
중국적인 문화에 물들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전통적인 생활방식과 전쟁 수행능력을 가지고 있는 금나라의 강력한 저항은 키탄인에게 몽골과의 민족적 유사성과 여진족에 대한 증오심을 부추김으로서 주도권을 확보하였다.
여러 민족들이 하나의 정치적 단위로 통합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코라즘에게는 민족적 반목을 이용하였다. 이미 몽골초원의 전쟁에서 하늘이 자신을 군주로 선정했다고 소문을 널리 퍼뜨려 샤머니즘이 강한 당시 몽골인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칭기스칸은 실크로드를 통해 서역과 초원을 오가며 무역을 하던 국제상인들의 활동을 장려하고 안전을 약속함으로서 이들의 도움도 빌렸다.
몽골의 승리만이 상업에 번영을 가져올 수 있다고 판단한 이들은 각 민족의 국내정세에 관련된 정보를 칭기스칸에게 넘겨주었으며 오아시스 주민들에게 저항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생명과 재산의 보호를 받지만 저항할 경우에는 처참한 학살을 당할 것이라는 불안을 퍼뜨려 주민들의 저항의지를 꺾었다.
칭기스칸은 무슬림 상인들을 처음에는 첩자로 이용했으며 다음으로는 중재자로 그리고 나중에는 사신과 지역 통치자로 임명하였다. 이들은 지주들에게 멸시 당했던 중국의 상인들보다 지적이었고 자유분방하였으므로, 여러 정복지역 특히 서아시아의 몽골 정복지를 잘 통치하였다.
그러나 칭기스칸은 대외정복보다는 고향인 몽골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관심이 더커서 메르키트와 삼림민을 치고 나이만족의 쿠출룩을 추격하였으며 탕구트를 치려고 서방작전을 중지하기도 하였다. 몽골제국은 아직도 풀 냄새나는 초원의 제국이었던 것이다.
詩 [칭기스]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에 몽골의 시인 푸렙도르지(Purevdorj)는 다음과 같은 “칭기스”라는 시를 썼다. 지금은 일흔살이 넘은 푸렙도르지는 ‘국민문학상’을 두 번째로 수상한 몽골의 유명한 시인이다. 시의 전문은 이렇다.
" 칭기스 "
테무진,
활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테무진,
화살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태무진,
어머니 허엘룬이 낳았다 태무진,
유구한 역사가 낳았다.
안락함보다 고통의 눈물이 흐르는 세상에
8백 년 전 살아갈 힘조차 없을 때
기쁨과 슬픔 사이에 어린 태무진이 자라서
평화와 전쟁 사이를 9개의 술데*로 연결했다.
야생마의 갈기처럼 빛나는 몽골의 초원에서
옥새(玉璽) 같은 하얀 게르를 짓고
오논 강가의 빗방울처럼 많은 말들 중에서
새벽 서리에 2마리 준마를 훈련시켜
몽골민족을 독립시켰다.
하늘의 별처럼 곳곳에 흩어진 몽골을
하늘의 태양처럼 단 하나의 몽골로 만들었다.
푸른 몽골의 영웅은 지상의 태풍도 막지 못했고
이를 갈던 유럽조차 칭기스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몽골의 말발굽 소리가 대륙(大陸)의 양끝을 진동시키고
유럽은 맨발로 뜨거운 재를 밟았다.
그래, 전쟁으로 인해 흰 우유가 흐르지는 않는다**
그래, 용맹한 몽골의 장군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다.
그래, 칭기스칸의 이름은 알타이산맥까지 울린다.
그래, 칭기스칸의 이름은 오늘날까지 쟁쟁하다.
후손에게 나쁜 짓을 하려는 생각이 없었고
세월이 가도 오논강은 변하지 않았다.
칭기스칸의 푸른 몽골은 고난과 슬픔과 정복을 겪었고
오늘의 붉은 몽골은 승리와 발전과 행복을 얻었다.
칭기스칸은 독수리처럼 날아서
업보와 복락(福樂)을 후손에게 맡겼다.
불과 물에 서로 부서지면서 모인 세상의 얼굴 위에
화살촉으로「몽골」이라고 썼다.
칭기스, 활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칭기스, 화살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칭기스, 어머니 허엘룬이 낳았다.
칭기스, 유구한 역사가 낳았다.
(주) * 말의 꼬리털로 만든 깃발
** 인간을 위한 전쟁을 했지만, 인간들에게 고통도 주었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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