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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연구

유토피아

저자 토마스 모어
장르 공상소설 (오호!!)
발표 1516년

1516년 간행. 라틴어로 쓰여졌다. 저자가 히스로디라는 선원(船員)으로부터 이상의 나라 ‘유토피아’의 제도 ·풍속 등을 들은 것을 기록하는 형식으로 이상사회를 묘사한 작품인데, 간접적으로는 당시의 유럽, 특히 영국사회의 현상을 비판하였다. 이 공화국에서는 전시민이 교대로 농경에 종사하는데 노동시간은 6시간, 여가는 교양시간으로 돌리며 필요한 물품은 시장의 창고에서 자유로 꺼내 쓸 수 있다.

그 내용은 여러 가지이지만 르네상스 휴머니즘의 정신을 반영하고 있으며 종교적 관용 ·평화주의 ·남녀교육의 평등 등을 주장하고 있다. 근대소설의 효시로 간주되며 사회사상사적으로도 고전으로 여겨지고 있다.

저자가 죽은 뒤인 1551년 영역판이 간행되었으며, 제목 ‘유토피아’는 본시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아무데에도 없는 나라’라는 뜻이었으나 이 작품을 계기로 ‘이상향(理想鄕)’이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조금 자세합니다만, 대체로 알고 있는 사항과 비슷할 겁니다.
실제로 읽어보면 더 재미있는 내용이 많습니다. 내용도 많지 않습니다. 하긴 모르겠네요. 요즘은 논술 덕분에 읽은 친구들이 많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책이 쓰인 시기가 1516년이라는 것을 주목하세요. 우리나라는 중종 때군요. 조광조가 왕도정치를 주창하고 있던 때입니다. 유럽은 1492년 콜룸부스가 중남미의 섬들을 발견했던 무렵이 되겠습니다. 영국은 헨리8세가 즉위해 있던 때였고요.

토마스 모어는 이 책에서 여러가지 재밌는 내용을 주장합니다. 가령 이런 것들이죠.

- 사유재산의 폐지 : 모어는 사실 공산주의자(^^)였습니다. 유토피아에는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으며 물품도 배급제로 당됩니다. 식사도 공동식당에서 함께 먹어야 합니다. 여행은 물론 여행증명서를 발급 받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는 노예제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단 이들 노예는 성실하게 지내면 풀려날 수도 있습니다.)
- 6시간 노동제 : 세계 최장 시간의 노동시간을 가지고 있다는 대한민국에서는 꿈도 못 꿀 이야기죠.
- 안락사 : 안락사는 명예로운 죽음으로 허용됩니다.
- 다양한 종교를 인정
- 전쟁에 대한 특이한 견해는 직접 읽어보세요...^^;;

이들의 결혼 방식은 특이해서 몇 자 옮겨보아야 하겠습니다.

신부가 될 여자는 처녀든 과부든 간에 존경할만한 기혼 부인의 입회 하에, 신랑이 될 남자에게 자신의 벗은 몸을 보이며, 신랑의 보호자는 신랑이 될 남자의 벗은 몸을 신부에게 보여줍니다.

이에 대해서 이런 설명을 붙이고 있죠. 말은 옷을 입고 있지도 않은데, 사기 전에 마구까지 벗겨 꼼꼼히 살피면서 왜 결혼할 상대는 살펴보지 않느냐고요.

그런데 아내를 선택할 때는, 좋든 싫든 평생 지켜야 할 약속을 맺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옷을 벗겨볼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기껏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조그마한 얼굴만 보고 그 여자를 모두 선택 파악했다는 듯 결혼을 진행시킵니다.

음, 멋진 방법이군요. 모어는 순진하게도 처녀의 알몸을 본 뒤 그 결혼을 취소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한 자도 적어놓지 않았습니다. 내 생각에는 미녀에게는 수많은 결혼 신청이 들어가지 않았겠는가 싶군요. 이 제도가 우리나라에 있다면 몇몇 여자 배우들은 맞선보느라 다른 일을 못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앗, 몇몇 남자 배우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요? 으음, 그렇겠습니다.)

기독교 신자였던 모어가 기독교의 열성적인 전도에 대해서 뭐라 이야기했는지 한번 봐 둘 필요가 있습니다. 원문을 인용합니다.

그 사람은 우리 일행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세례를 받자마자 신중하지 못하게 지나친 열정을 품고 기독교 신양에 대해 공공연한 전도를 시작했습니다. 너무 열중한 나머지 결국은 기독교의 우월함을 주장하는 정도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 외의 모든 종교들을 비난하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는 목청을 높여 다른 종교는 모두 사악한 미신이며 그것을 믿는 자들은 불경스러운 괴물이며, 영원히 지옥불 속에 갇히는 형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외쳐댔습니다. 그렇게 계속 떠들어대자 마침내 체포되어 기소되었는데, 그 이유는 신을 모독해서가 아니라 공공질서를 어지럽혔다는 것이었습니다. 유죄 판결을 받은 그는 국외추방형을 받았습니다. 유토피아 헌법에서 지켜온 가장 오래된 원칙은 바로 종교적인 관용이었기 때문입니다.


국외추방형 대목에서 속시원한 분들이 계시겠네요. 모 교회 목사님들 중에 이렇게 국외로(가능하면 아프가니스탄으로) 쫓아내 버렸으면 싶은 사람들이 좀 있지요...^^;;

유토피아
토머스 모어 지음, 권혁 옮김/돋을새김

사유재산제 사라진 농업 공동사회를 꿈꾸다


△ 박혜영/ 인하대 영문과 교수

토마스 모어 ‘유토피아’

인도로 가는 신항로를 찾아 모험을 떠났던 콜럼버스는 1492년 마침내 지금의 쿠바 근처인 바하마 제도의 와틀링 섬에 도착하였다. 콜럼버스는 총 224일에 걸친 자세한 항해일지를 남겼는데, 그 속에는 자신이 난생처음 인디오(Indio)들을 대면했을 때의 놀라움이 잘 담겨있다. 10월11일 오랜 항해 끝에 마침내 신대륙에 도착한 콜럼버스의 눈앞에는 그야말로 지상낙원이 펼쳐졌다. 비옥한 평지인 섬은 온통 푸른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온화한 날씨에 갖가지 과일과 맑은 물이 넘쳐흘렀다. 섬의 원주민들은 거의 알몸이었고, 아름다운 몸매와 자태를 지녔으며, 온순하고 순박하였다. 이들은 무기를 전혀 지니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무기가 무엇인지조차 몰랐다. 그래서 콜럼버스가 칼을 보여주자 아무것도 모르고 칼날 쪽을 잡았다가 손을 베기도 하였다. 이들은 처음 보는 낯선 이방인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백인들에게 먹을 것과 물을 가져다주며 섬을 둘러볼 수 있도록 안내까지 해주었다. 콜럼버스가 대면한 이 신세계는 인간과 자연이 마치 ‘신의 품안에서’(In Dios) 사는 것 같은 그야말로 평화로운 지상낙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류 역사에 실제로 존재했던 이 유토피아는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에게 황금과 노예를 약속했던 콜럼버스에 의해 얼마가지 않아 영원히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비슷한 시기에 영국에서도 한 휴머니스트가 유토피아를 꿈꾸었다. 헨리 8세 때 추밀원 의원과 대법관직을 역임했던 토마스 모어가 바로 그 사람이다. 콜럼버스의 신세계가 실제로 존재했던 지상낙원이었다면 1516년 출판된 모어의 <유토피아>는 서구가 오랫동안 꿈꾸어온 가상의 이상세계였다. 그리스어의 ‘없다’(U)와 ‘장소’(topia)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유토피아’는 결국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 혹은 현실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이상향을 말한다. 그러나 바로 유토피아의 이런 ‘비현실성’이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현실세계를 비판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됨은 물론이다. 모어가 유토피아 공화국의 이상적인 모습을 그린 2부에 이어 군주제하의 영국현실을 비판한 1부를 쓴 것도 유토피아의 정신이 실제로는 바로 현실비판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우리 현실에 비춰볼 때 <유토피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경제생활에 대한 모어의 통찰이다. 1부에서 모어는 ‘유토피아’ 섬에 5년 간 살았다는 라파엘 히드로다에우스의 입을 통해 ‘인클로저’라고 불리는 영국의 유명한 농업말살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큰 이윤이 생기는 양모 생산을 늘리려고 많은 귀족과 지주들은 소작인들을 모두 쫓아내고 농토를 목축지로 바꾸었다. 인클로저 정책으로 농부들은 선대부터 살던 정든 고향을 떠나 객지로 떠돌게 되었고, 농가는 허물어지고, 마을공동체는 사라졌다. 농사를 포기하자 당연히 곡물 값은 폭등하고, 거지가 된 많은 농부들은 굶주리다 못해 “처음엔 도둑이 되고, 다음에는 시체가 되는” 절박한 상황으로 내몰렸다. 법은 언제나 약자에게 가혹하기 마련이기에 사소한 절도죄도 교수형에 처해졌다. 결국 유순한 양(羊)이 돈 때문에 사람까지 먹어치우게 된 것이다.

도둑이 되고 시체가 된 농부들

반면 독과점 형태의 양모산업은 나날이 번창하여 부자들은 노동하지 않고도 엄청난 부를 축적하였고, 많은 일손이 필요했던 농토에는 결국 양치기 한 사람만 남게 됨으로써 실업자 수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라파엘이 비판했던 것은 비단 500년 전 영국의 상황만이 아니다. 지금 우리의 농촌현실도 마찬가지다. 비옥한 농지들이 하루가 무섭게 상업용지로 바뀌고, 시장개방과 채무에 시달린 농민들이 농약을 먹고 자살한다. 빈부격차를 가속화하는 기업세계화에 반대하며 농업은 상품이 아니라고 농민들은 고통스럽게 절규한다. 한 국가가 생존에 필수적인 농업을 포기하고 교역위주의 상공업으로 돌아설 때 과연 누가 그 과실을 챙기고, 누구에게 큰 고통이 따르는지 모어는 영국현실을 빗대어 신랄하게 비판한 것이다.

유토피아 시민은 누구든 농업을 해야한다
부의 축척도, 화폐도 없다
따라서 블로소득도 없고 빈부격차도 있을수 없다


△  토마스 모어 <유토피아>의 주인공 라파엘 히드로다에우스가 5년 간 살았다는 유토피아 섬의 가상도(판화). 유토피아 섬의 중심지인 아마우로툼 시에 여러 건물들이 눈에 들어오며, 그림의 왼쪽부터 시작해 오른쪽으로 흐르는 아니드루스 강이 보인다.

이 점에서 보면 2부에 나오는 이상적인 섬나라 유토피아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모어가 자급자족적 경제를 꼽고 있다는 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물론 자급자족의 가장 중요한 사회경제적 기반은 농업이다. 유토피아 인구의 90퍼센트는 하루 6시간씩 육체노동을 하는데, 그 유토피아 “시민이면 누구든지 하는 일이 바로 농업”이고, 여기에 덧붙여 직조나 목공 같은 생계에 필수적인 수공업적 기술을 익힌다. 이들은 “토지를 재산으로 여기기 않고 다만 그들이 경작해야 할 땅”이라고 생각한다. 모어의 유토피아에는 유럽과 달리 두 가지 직업이 없는데, 하나는 변호사이고, 다른 하나는 상인이다. 유토피아의 법률은 실로 간단하고 쉬워서 변호사와 같은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 없고, 기본적으로 사유재산과 부의 축적, 화폐가 없기 때문에 상인도 있을 수가 없다. 유토피아에도 시장은 있지만 이것은 필수품을 교환하거나 가져오는 곳이지 화폐경제가 통용되는 곳이 아니다. 유토피아 섬에는 불로소득도 없고, 빈부격차도 있을 수 없다.

비록 노예는 존재하지만 이들은 경제적 이유보다는 간통이나 다른 중죄를 지어 노예가 되며, 일정한 절차를 거치면 다시 시민이 될 수 있다. 어떤 정치적, 경제적 특권계급도 존재하지 않고, 연장자가 존중받는 대가족 생활을 하면서, 모두 인간영혼의 불멸성을 믿고, 현재의 삶이 사후의 상벌로 이어진다는 겸손함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것이다. 결핍의 공포가 없기에 축적의 욕망이 없으며, 금, 은은 희소가치가 없기에 그러한 것을 소유하거나 과시하고자 하는 욕구도 없다. 금과 은은 생존에 필요한 것이 아니기에 주로 요강이나 노예들의 쇠사슬로 쓰일 뿐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그런 헛된 욕망을 갖지 않도록 “자애로운 어머니와 같은 자연은 흙, 공기, 물처럼 가장 귀중한 천혜의 물질은 일부러 눈앞에 드러내 놓았으면서도, 우리에게 불필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 감추어 두었다”고 믿는다. 도살과 사냥과 전쟁을 싫어하고, 교육과 독서를 중시하며 겸허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물론 모어가 그린 이상사회에도 약점은 있다. 유토피아 공화국은 그 필요에 따라 이웃 나라를 식민지로 삼기도 하고, 전쟁을 하게 되면 용병을 동원하는 제국주의적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이것은 토마스 모어가 아무리 뛰어난 도덕적 상상력의 소유자였다 할지라도 한 사람의 유럽인으로서 그가 벗어날 수 없었던 유럽중심적인 인식론적 한계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른다.

경제독점은 왜 견제하지 않는가

토마스 모어가 보다 나은 세상을 꿈꾼 지 약 500년이 지났다. 그동안 서구제국주의는 세계 도처에 실제로 존재했던 지상낙원은 모두 허물어뜨리고 가상의 유토피아를 꿈꾸면서 근대문명을 이룩해왔다.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에게 유토피아란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정치적으로 권력의 독점은 경계해왔으면서도 경제적인 부의 독점현상에 대해서는 그것이 개인능력에 따른 결과라고 관대히 받아들여왔다. 정치권력의 억압과 횡포에는 저항하면서도 경제적 불평등의 현실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저 부자들을 따라잡으려고 애써왔다. 어째서 정치권력은 제한을 받아야 민주적이라고 생각하면서 경제적 축적에는 한계를 그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 어째서 정부는 민주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기업의 독재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가?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우리 모두에게 부(富)의 유토피아를 약속하지만, 이것은 마치 사막의 모래바람처럼 한쪽으로만 부를 쏠리게 할 뿐 결코 경제적 민주화를 가져다주지 못한다. 오늘날 자본의 모래바람 속에서 파괴되고 죽어가는 자연과 사회적 약자들의 운명을 똑바로 보는 데, 그래서 우리가 새로운 대안을 꿈꾸는 데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매우 유익한 길잡이가 될 것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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