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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연구

미래학이란 무엇인가

미래학은 뭘 공부하는 것인가. 어차피 미래는 아직 현실화되지 않아 공부할 것도 없다. 역사학은 사료(史料)가 있지만 미래학은 글쎄, 공상과학영화가 있다고 해야 할까. 하와이에서 미래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첫 시간에 배우는 것이 ‘데이터의 7가지 미래 법칙’인데,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미래학이 뭘 공부하는지 잘 나타나 있다. 40년 동안 미래학을 가르치면서 정리하고 가다듬은 미래학의 ‘팥소’라고 할 만하다.

 

첫째 법칙 미래는 공부할 수 없다. 미래는 현재 존재하지 않으니까. 따라서 미래학은 미래를 공부한다는 흉내도 내서는 안 된다. 그럼 뭘 공부하는가. 미래의 이미지를 공부한다. 그게 뭔데? 각자가 갖고 있는 미래에 대한 그림이다. 미래학 강의 첫 학기에 읽어야 하는 논문에는 세계의 미래학자들이 그려낸 미래의 이미지들이 들어 있다. 이슬람의 미래, 유럽의 미래, 아프리카의 미래, 중국의 미래, 한국의 미래….

 

영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한 여성 미래학자는 3년 동안 세계를 자전거로 여행하면서 나라별로 대륙별로 사람들이 갖고 있는 미래의 이미지를 조사·연구하고 있다. 사람들은 처지에 따라, 사는 곳에 따라, 가치관에 따라 다양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이런 이미지를 이해하는 일이 중요한 것은 대부분의 사람이 미래의 이미지를 좇으며 현재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그’를 이해하려면 그가 그리는 미래의 이미지를 알아야 한다.

 

둘째 법칙 미래는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대안이 될 만한 미래들은 예측할 수 있고, 예측해야 한다. 여기에선 ‘미래’라는 단어와 ‘미래들’이라는 복수형에 주목해보자. 미래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초기에 ‘Futures(미래들)’라는 단어에 익숙해져야 한다. 습관대로 ‘Future (미래)’라고만 발음했다가는 먼저 미래학을 공부한 선배들에게 핀잔을 듣는다. “퓨처가 어디 있어? 퓨처스라고! ” 내가 하와이주립대 미래학대학원에 입학원서를 제출할 때 도움을 준 서용석 KT 미래사회연구원 선임연구원이 있다. 

 

그는 “미래학을 영어로는 ‘Futures Study’라고 쓰는데 복수형 s를 꼭 붙여야 한다”고 조언해주었다. 그러곤 한마디 덧붙인다. “퓨처라고만 했다가는 큰일납니다! ” 복수형으로 미래를 언급하는 이유는 미래가 피할 수 없는, 그래서 무섭거나 폭력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미래는 인간이 선택할 수 있고, 어떤 가능성이든 열려 있으며, 이견(異見)이 생길 수 있고, 희망이 있는 공간과 시간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래의 가능성이 하나만 있다고 가정해보라. 얼마나 암울한가.

 

 “한국인이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는 데는 다른 이유도 있는 것 같다”고 말하자 그는 “다른 나라의 발전 방식을 모방해 부(富)를 쌓은 나라의 경우 어느 순간 그 부를 지키는 것에 엄청난 불안감을 느낀다”고 했다. 하나의 미래만 제시하고 따를 것을 강요하는 사회, 발전의 원동력을 남의 것에서만 찾는 사회의 시민들은 미래가 두려울 수밖에 없다.

 

셋째 법칙 최선의 상황을 가정하는 시나리오나 반대로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는 시나리오는 쓰지 않는 것이 좋다. 우리가 ‘최선’이나 ‘최악’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낼 때 으레 간과하는 것은 그 반대의 측면이 있다는 사실이다. 밝은 날에도 넘어지는 사람이 있으며 깜깜한 날에도 이익을 보는 사람이 있다. 따라서 누구에게나, 어느 때라도 항상 기회는 있다. 어떤 미래가 와도 놀라지 않도록 준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넷째 법칙 “반드시 이뤄진다”는 말은 종종 ‘빈말’로 끝난다. 가장 실현 가능성이 높은 미래 혹은 가장 실현되기 어려운 미래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반대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다. 예상치 못한 일이 버젓이 벌어지는가 하면 분명 예상한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게 우리가 사는 현실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미래를 예상하고 대안을 내놓을 때 ‘실현 가능성 : 높음, 중간, 낮음’이라는 단계를 만들지 않는 게 바람직하다. 어디에도 무게가 쏠리지 않는 대안을 내놓아 사람들이 편견을 갖지 않고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

 

다섯째 법칙 점쟁이가 되지 말고 행동가가 되라. 미래학의 주요 역할은 개인이나 단체가 스스로 미래의 비전을 만들고, 실현 방안을 만들고, 그 방안에 문제는 없는지 꾸준히 관찰하면서 개선하고, 개선된 현재에서 다시 미래의 비전을 만들고 또 다른 실현방안을 만들도록 돕는 것이다. 미래학에선 유토피아나 디스토피아란 단어를 쓰지 않는다. 둘 다 어두운 부분, 의도적으로 감춰진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또 둘 다 실현가능성이 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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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미래학에선 이토피아(Eutopia)라는 단어를 선호한다. 이는 현재 우리의 노력과 약간의 운으로 충분히 실현할 수 있는 미래라는 뜻이 내포돼 있다. 억지로 따라 하거나 생각 없이 좇아야 하는 미래는 이토피아가 아니다. 새로운 정보와 기술에 따른 희망과 공포를 적절하게 예상하면서, 우리에게 닥칠 문제를 즐거운 마음으로 진단하고, 세심하게 대책을 만들며, 지속적으로 우리의 대안을 점검하고 개선하고 바꾸는 것이 이토피아를 실현하는 방법이다.

 

여섯째 법칙 사회에 유용한 아이디어는 처음엔 황당하게 들린다. 어떤 미래는 현재나 과거의 모습이 투영돼 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이런 미래가 실현돼도 별로 놀랄 것은 없다. 그러나 어떤 미래는 공상과학영화에나 나올 법한 황당하고 전혀 들은 바 없는 것이다. 

 

일곱째 법칙 미래학자는 황당한 아이디어의 실현 가능성을 짚어줘야 한다. 사실 나에게 황당한 것은 남에게도 황당한 것이다. 따라서 황당한 아이디어가 소멸되지 않고,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까지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미래학자는 황당한 이야기만을 떠들어대는 사람은 아니다. 분명한 증거를 제시하고 가능한 시나리오를 도출해서 사람들이 황당한 이야기를 믿을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한다.

 

. 데이터 교수는 새벽 5시30분이면 일어나 인터넷을 검색하며 자료를 찾아 모으고 오후엔 학교 연구실에 나와 e메일을 주고받느라 정신이 없다.

 

 데이터 교수의 정보검색 기술은 따로 지면을 할애해 설명해야 할 것 같은데, 나로선 흉내 내기 힘들 정도로 다양하고도 집요하다. 그의 컴퓨터 메인 화면에는 새로운 정보만 모아 정리해놓은 ‘Scan’이라는 폴더가 있다. 이 폴더에 저장된 정보는 그가 예전부터 추적하고 관계를 맺어온 과학자, 사상가, 미래학자, 발명가, 사회과학자, 건축가, 생물학자 등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신기술에 대한 그의 관심은 꽤 오래됐는데, 일례로 1973년에 쓴 그의 글 ‘왜 미래학이 필요한가(Why Futuristics?)’를 보면 이미 인공두뇌학(Cybernetics),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자기복제(Self-reproducing), 지구환경의 단일화(a single ecosystem of the world) 등 신기술과 다가올 환경에 주목한 것을 알 수 있다.

 

언젠가 내가 정보를 모으는 방법에 대해 묻자 그는 “사람을 좇으라”며 “근원과 가깝게 지내라(close to the origin)”라고 한 적이 있다. “새로운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을 좇아 그가 어떤 글을 쓰는지 꾸준히 읽어보고, 그가 제시하는 아이디어의 근원은 무엇인지 추적하는 게 중요하다”는 이야기였다. 이렇게 한 덕분에 데이터 교수는 인공지능이라는 주제만 해도 근 40년 동안 기술의 변화를 추적하고 있으며, 그 기원과 관련 학자들을 꿰게 된 것이다.

 

“흘러간 노래길 바랐으나…”

1980년대와 90년대는 아마 그의 인생에서 가장 바빴던 때로 기억될 것이다. 세계 미래학자들의 네트워크인 세계미래학연맹(World Futures Studies Federation)의 사무총장과 대표를 연달아 맡아 지구를 종횡무진 행진했기 때문이다. 이념의 대립이 극심했던 1980년대에도 그는 자본주의 국가들은 물론 동유럽, 중국, 북한 등 사회주의권 국가까지 방문해 미래학 대회를 열었고 사회주의 미래학자들과도 끈끈한 유대관계를 과시했다.

 

그 과정을 통해 그는 새로운 개념을 많이 고안해냈는데, 그중 잘 알려진 게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넘어선 ‘오그웨어(orgware)’다. 이는 ‘organizationware’의 준말로,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가 잘 작동하도록 사람이나 기관을 조직하는 기술을 말한다. 이 용어는 당시 소련의 한 부분이었던 우크라이나의 미래학자 도브로브와 대화하면서 탄생했다. 미래는 경계를 허물 때 더 잘 보이는 법이다.

 

사회주의 미래학자는 물론 정치인들과도 교류했다. 중국의 리펑 총리를 만나기도 했고, 1989년엔 평양에서 당시 북한사회과학자협회 위원장을 맡고 있던 황장엽 노동당 비서를 만나 미래학에 관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는 그때 북한 사회에서 받은 인상을 이렇게 적고 있다. “북한 사회는 마치 교황이 있는 로마의 바티칸 시티나 몰몬교도들이 몰려 있는 유타 주 솔트레이크시티를 연상케 한다.” 솔트레이크를 언급한 이유는 “남이 뭐라든 자신의 길을 간다는 점에서 그렇다”고 적어놓았다. 독특한 인상이 아닐 수 없다.

 

1990년은 미래학자들 조차 세계의 변화에 대해 깜짝 놀란 해였다. 동독과 서독이 통일됐기 때문이다. 그는 ‘세계미래학연맹과 나’라는 글에서 당시의 소회를 이렇게 적고 있다. “진실로 1990년은 진공상태였고, 기회였고, 위기였다. 미래학자들이 동유럽의 변화를 예측하고 직접 변화를 일으키기도 했지만 1990년의 상황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너무나 빠른 변화였다.

 

미래학자라면 누구라도 끊임없이 ‘다음은 무엇인가(What´s next?)’ 또는 ‘우리가 소망하는 미래를 얻은 뒤엔 또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졌어야 했다. 이런 질문을 하지 않으면, 비록 우리가 꿈을 이뤘어도 조만간 미래는 저만치 멀어지고, 우리가 이룩한 것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나에게 스승의 눈물을 본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보진 못했지만 울었던 것은 틀림없다”고 답할 것이다.

 

2008년 7월 데이터 교수는 미래학계의 대표저널로 평가되는 ‘퓨처스’40주년 기념 논문에서 ‘40년 전 ‘퓨처스’첫 호에서 미래학자들은 머지않아 세계의 에너지 자원이 고갈될 것이라고 분석했는데, 지금도 같은 소리를 반복하고 있다. 도대체 뭐가 변했는가’라며 미래학자들의 자성을 촉구했다. 1968년이라면 석유파동이 있기 전이다. 그런데도 미래학자들은 ‘퓨처스’첫 호에서 “지금까지 인류는 미래세대에게 물려줘야 할 지구의 자원을 마구 사용했다.

 

그 대가로 조만간 지구의 생태계가 위협받을 것이다. 에너지 자원을 다양화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하며, 자원의 효율성도 높여야 한다. 에너지 부국과 빈국의 불균형을 해소하는 방안도 시급한 과제”라고 주장했다. 지금 읽어도 전혀 생소하지 않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똑같은 ‘흘러간 노래’를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Jim Dator
미국 스텟슨대에서 역사학 및 철학전공, 펜실베이니아대 석사 (정치학), 아메리칸대 박사 (정치학)
서울대 국문과 졸업, 동 대학 석·박사(국문학)
일본 릿쿄대 교수, 일본 외무성 부설연구소 교수, 미국 버지니아대 교수, 세계미래학연맹 초대 사무총장·대표
現 미국 하와이주립대 미래학 대학원장·정치학 교수, 프랑스 국제우주대 교수, 세계미래학연맹 이사

누구도 찾아 읽은 적이 없는 듯 40년 전 나온 잡지는 먼지가 쌓이고 색이 누렇게 바랬다.

 

이를 본 노(老)학자는 눈물을 흘리고 만다. “I wiped a few tears of nostalgia from my eyes, and wondered about the futures of the futures(옛날 향수에 젖어 눈물이 흘렀고, 나는 미래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었다 - ‘퓨처스’ 2008년 7월호에 실린 데이터의 글 ‘Futures, volume one and two : Then and now’ 중에서 발췌). 눈물을 닦은 노학자는 실망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격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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